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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김문기와 상지대
상지대는 최근 수년간 학원의 민주화가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한 때 이 대학은 이 나라 사학 비리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했었다. 온갖 비리 의혹이 다년간에 걸쳐 제기됐으며 마침내 이사장 김문기가 구속수감 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현역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더욱 매스컴의 관심이 집중됐었다.

그러면 김문기는 누구이며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일까?

6·25 전쟁이 끝난 후 60년대 초까지 서울의 인사동 거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빠고다 가구 공예전'이란 큰 간판이 걸린 가구점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는 누구나 가정을 갖게되면 자기 집에 호마이카 가구 하나 들여놓는 것이 큰 꿈이었다. 서양화나 동양자수를 칠 속에 넣은 호마이카 가구로 특허까지 받아 놓은 김문기는 워낙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 때부터 강릉시내 가구 공장에 나가 기술을 배우며 공부를 했었다.
그가 마침내 서울 제일의 가구점을 만들고 2천여평의 가구 공장까지 운영하더니 지난 72년 5월 원주의 청암학원 이사로 부임하고 다음해 12월에는 제3대 이사장이 된 것이다.

청암학원은 지금의 상지학원이다. 그리고 근 10년 후인 지난 93년에 김영삼 정부에 의한 사정바람이 불 때 그는 사학비리 혐의로 구속 수감된 것이다.
이때 그는 상지대 이사장일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의 막강한 신분이었고 옛날의 '빠고다 가구점'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날의 모습에 대해서 그의 딸 김용남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아버지가 연행되는 모습을 TV에서 자극적인 표현과 화면으로 여러 차례 접하면서 우리 가족의 가슴은 메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너무도 슬픈 나머지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국민이 뽑아준, 도주의 위험이 없는 현역의원을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느냐'고 울부짖기도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공직자 사정의 가장 가혹한 단죄의 대상이 아버지냐고 원망도 해 봤다.
나로서는 이번 사건의 사실상의 내막에 대해선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아버지는 국회의원직을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죽음을 택했다.
동시에 생애의 과업인 대학 이사장직도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단죄 받기 위해 구치소의 찬 마루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 가족은 여기서 '이번 사건'이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사건의 시작은 이미 10년전에 김문기가 관선이사로 청암학원에 부임하던 때부터 시작된다.

독립운동가로서 해방 후 홍익대를 설립했던 이흥수가 이 학교의 설립사에서 슬그머니 뒤로 가려지고 또 항일하면서 근화학원(지금의 덕성학원)을 설립했던 차미리사가 역시 덕성의 설립사에서 소외되고 박정희를 교주로서 재단에 못박아 놓고 있는 지금의 영남대, 그리고 박철웅이 독재하던 조선대 등이 그렇듯이 상지대도 김문기에 의해 원래의 청암학원이 지워지고 원주대가 폐교되는 절차를 거쳐서 상지 학원이 상지대로 부활한 것이다.

이렇게 원래의 설립자들이 그 대학의 역사에서 가려지는 과정에는 다 같이 공통적인 공식이 있다. 그것은 자금난으로 인한 체질약화와 이 시기를 이용한 막강한 권력 개입의 합작이란 공식이다. 자금난으로 학교 운영이 어려워질 때 권력을 업은 세력이 나타나서 단계적으로 그 대학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덕성여대가 일제시대에 일제권력을 이용한 세력에 의해 주인이 바뀌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해방 후는 군사독재정권이 특히 독이 올랐을 때 그 힘을 업은 세력이 또는 그 권력 자체가 대학을 빼앗은 것처럼 대학에 개입한 권력은 모두 반민족적 또는 반민주적 독재권력이다.

○ ○ ○

상지대의 경우는 이렇다.

박정희 3선 개헌으로 더욱 포악해진 독재자로서 공포분위기를 만들고 이어서 유신헌법 선포직전이던 지난 72년 5월, 그 절정기에 김문기가 청암학원에 나타났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파견하는 관선이사로 부임되고 곧 이어 유신헌법이 선포된 이듬해 12월에는 이사 장에 오른다. 그리고 다음달 1월에는 청암학원을 무상 인수한 다음, 이름을 상지학원으로 바꿈으로써 청암학원의 이름을 이 대학의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이사로 부임한지 1년 8개월만의 일이며 눈부신 속도였다. 김문기의 추진력도 대단하지만 무서운 권력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관선이사 파견은 재정난으로 학교 경영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문기가 구속되고 이사장직을 물러난 후 학교법인 상지학원이 밝힌 국정감사 제출용 자료 등에 의하면 김문기는 학교 재정이 그렇게 어려워졌을 때 홀연히 나타나서 이 학원을 인수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대학의 설립사는 지난 55년에 만들어진 '관서대의숙' 시대부터 시작된다. 원주지역 유지들이 원홍묵(元鴻默)을 중심으로 대학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며 관서대의숙을 설립하고 원홍묵이 초대 학장이 된 것이다.

그 후 지난 62년에 원홍묵은 재단법인 '청암학원'을 설립하고 이듬해에 관서대의숙을 4년제 야간대학인 '원주대'로 발전시켰다. 그런 후 10년이 가까워 올 무렵부터 갑자기 그에게는 포악하고 탐욕적인 권력의 손이 뻗쳐지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3인의 증언을 통해 들어보자.

설립자 원홍묵씨가 지난 93년 강원도민일보와 한국일보, 세계일보 등에 회고한 당시 상황은 이렇다.
"72년 10월 유신 뒤 김수근 강워도 교육감으로부터 지난 76년까지 기준에 미달된 시설을 완비하라는 당시 문교부의 지시를 받았으나 재정난으로 시설확충에 어려움을 겪던 중 지난 74년 갑자기 문교부 장관(민관식)의 지시라며 대학을 김문기에게 양도하라는 통보를 받고, 당시 시가 30억원 규모의 대학을 빼앗겼다. 김문기는 인수과정에서 나를 종신 명예학장으로 추대하고 생활비와 위로금(6백만원)은 물론 사택을 주기로 했으나 나중에 이를 지키지 않았다"

당시 강원도 교육감이었던 김수근 이사가 지난 74년 1월27일 이사회에서 한 발언이 회의록에 이렇게 남아있다.
"전 설립자인 원홍묵씨에게도 권리일체를 양도할 것을 종용한 결과 양인이 승낙하여 수일전에 인수인계의 합의서에 조인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이사회에 보고되기 전에 사실이 누설될 우려가 있어…"

이에 대해 당시 원주대 경리계장으로 재단의 실무를 맡았던 황규선씨의 증언
"원주시 봉산동 1082번지에 있던 원주대가 자금부족 등으로 부실운영돼 관선이사가 운영하고 있을 당시 문교부 고위직에 있던 모씨가 자신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있던 김문기씨에게 원주대를 넘겨주기 위해 '감사를 하겠다'는 등의 각종 압력으로 당시 이사장에게 재산목록을 제출토록 하고 이사장 자리에게 쫓아냈다"

여기서 설립자 원홍묵의 증언을 보면 72년 유신정권에 의해 시설확충 지시를 받았는데 재정난으로 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문교부장관 민관식이 대학을 김문기에게 양도하라고 통보했으며 양도 후에는 생활비와 위로금 등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 유신정권이 전국 각 대학에 하달한 대학시설기준령 완비 독촉은 이 대학만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거의 모든 대학은 이 기준령에 미달되고 있다. 다만 원주대는 특히 재단이 영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서서히 성장 발전하고 있는 대학이었는데 갑자기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대학을 김문기에게 양도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민관식 지시설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으나 이 말을 전한 것이 김수근 강원도 교육감이며 그가 적극적으로 원홍묵 밀어내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는 김문기와 함께 이 대학에 관선이사로 파견된 교육감이며 이 대학에 대한 감사를 교육부에 수차 간청했고 원홍묵에게 직접적으로 '권리 일체를 양도할 것을 종용'했다고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그런 후 원홍묵과 김문기 양인이 승낙하여 '인수인계의 합의서'에 조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수근은 두 사람의 합의조서 작성 때 입회인 역할을 하며 함께 서명 날인했다.

그런데 원홍묵은 왜 김수근의 '종용'에 순순히 따랐을까? 학교가 발행한 공·사채 등 부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학교법인이 파산으로 채무자에게 넘어가게 된 것도 아니고 자산이 당장 채무자 대표로서 감옥에 갈 것도 아니고, 공금을 횡령해서 자기 배를 불린 것도 아닌데 왜 그는 청암학원의 모든 재산과 학교 운영권을 일체 김문기에게 양도하며 '당사자간에 합의된 약정사항에 관해서는 금 후 민사상 혹은 형사상의 권리주장과 이의제기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일체 하지 못하며 여하한 명목으로도 이에 관여하지 못한다'에 서명날인 했을까?

교육감이 문교부 장관의 이름을 팔았든 말든 막강한 정부 권력이 나서서 '양도하라'했고, 당시가 특히 유신체제로서 사정없이 교수, 학생, 종교인, 기타 재야인사들을 투옥하고 고문하고 서울대 교수가 의문의 죽음까지 당하던 바로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하지 않으면 원홍묵이 청암학원을 순순히 내 놓은 이유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 후 청암학원이 운영하던 원주대는 폐교절차를 거친 후 상지대란 이름으로 부활했다. 재단법인 이름도 상지학원으로 바뀌었다. 그럼으로써 이 대학의 역사에서 원홍묵은 사라지고 설림자는 김문기가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이 대학에는 갖은 비리와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된다. 지난 99년도 국정감사 제출자료에 의하면 부정 의혹 사례를 열거해 나간 것만으로도 5백여 페이지의 책자가 된다.

수백명의 학생 부정 입학 의혹에서부터 도서관 신축공사비 10억 7백만원 착복 의혹, 학원부지 개인 소유화 시도, 불온유인물 살포와 용공조작 의혹, 비판적 교수에 대한 사상범 조작과 시국사범 조작에 의한 교수들의 재임용 탈락 의혹, 그리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호화분묘 조성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이 가운데는 아직 재판에 계류중인 사안도 있어 진실 여부에 대한 판단이 최종적으로 남아있지만 거론된 의혹이 이처럼 다양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지난 80년에 있었던 전조영 교수사건은 사학 재단이 교수들에게 가했던 압력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상지대 내·외부에서 회자되고 있다.

○ ○ ○

영어교육과 학과장이며 도서관장이었던 전조영 교수는 어느날 갑자기 군인들에게 체포돼 온갖 고통을 겪으며 마침내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대학에서 해직된다.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 조정한 사상범이 된 것이다.

그가 체포된 지난 80년 5월20일은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신군부가 광주를 포위하고 미증유의 학살작전을 펴던 공포의 절정기가 된다. 교수협의회 등에 따르면 전교수가 이때 체포된 이유는 이해 4월경부터 학생들이 학교재단에 대해 교육여건개선, 복지시설확충 등 8개 항목을 요구하며 농성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 상황은 전조영 교수가 문교부에 제출한 탄원서에 잘 나타나있다.
탄원서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은 학교에서 물을 마시려면 화장실 수돗물을 손으로 받아 마셔야 했고, 가정학과 조리 실습도 화장실물을 퍼다 써야 했고, 체육시간이 되면 여학생들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등 너무도 학교 시설이 낙후돼 있었는데 재단은 이를 고쳐 나가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김문기는 학생들이 이런 고충을 호소해도 들어주려 하지 않다가 농성 시위까지 벌어지자 시위 가담 학생이 많은 학과의 교수를 배후의 선동자로 몰고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살기등등했던 신군부는 '전 교수가 학생시위를 배후조정하고 있으며…'라는 진정서가 접수되자 그를 즉각 체포하고 포고령 위반 사상범으로서 1년6월 실형을 언도했었다. 그 후 항고한 전 교수는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감문기는 그의 복직을 결국 허용하지 않았다.

86년의 불온 유인물 살포사건이나 76년에 교수 9명이 시국사범으로 몰려 재임용 탈락된 과정 등도 전 교수 사건과 함께 공통적인 음모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증언. 즉 김문기는 재단비리를 비판하고 학교운영 정상화를 주장하는 교수들을 탄압하고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적 권력의 속성을 적절히 이용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등은 정치권력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반공을 그 수단으로 삼고 빈번하게 반공법 국가보안법 시범을 조작해 나갔으며 김문기는 비판적인 교수 탄압을 위해 이 같은 시국사범이나 사상범 색출 또는 조작에 혈안이 돼 있는 자들에게 사냥감을 던져준 셈이 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런데 그 후 사정바람으로 구속 수감됐던 김문기는 이듬해 8·15 특사로 석방됐다.
이렇게 석방되자 김문기는 재단복귀를 꾀하며 끊임없이 청와대를 비롯한 국가기관에 탄원 민원 진정서를 보내고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93년에 총장으로 취임했던 김찬국 교수가 다음해에 해임되고 만 것도 김문기의 고지 재탈환 작전의 일환에 속한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래서 해임까지 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김찬국 총장은 지난 97년에 다시 취임하고 지난 99년에는 한완상이 그 자리를 이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김문기에 대하여 비판적인 모 교수가 체육과 일부 학생들에게 납치돼 폭우가 쏟아지는 길거리에서 2Km 정도 끌려 다니며 폭행을 당한 사건이 터졌다.
당시 이 사건은 반인륜적인 행위로 매스컴에 대서특필되었고 이들 학생들이 평소 김문기 재단 복귀를 주장해온 점으로 미뤄 이 학교 교수협의회는 이 사건의 배후에 김문기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문기는 지난해에도 청와대에 진정서를 보내며 김찬국 총장에 대한 비방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출옥 후 수년간 대학 재탈환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셈.
이것을 보면 김문기의 불굴의 의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난한 시골의 한 소년이 목공소에서 일하며 학교 다니다가 상경한 후 한국 제일의 유명 가구점과 공장을 경영하고 마침내 대학 이사장이 되고 국회의원까지 된 것은 남다른 수완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어떤 장애물도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는 불굴의 의지가 그를 그 자리까지 밀어 올렸던 것이며 그 의지는 감옥살이의 철퇴를 맞고도 조금도 꺾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입지전적 인생 역정은 매우 감탄할 만 하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이 나라 사학의 설립사가 왜곡되고 대학의 양심들마저 멍들고 짓밟혀 온 것은 이 나라 사학의 매우 불행하고 부끄러운 역사가 될 것이다. 【자료 협조 = 상지대 대외협력처 제공】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2000-11-27 오전 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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