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회군’ 사건은 당시 학생운동 진영에 뜨거운 이론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무림노선과 학림노선 사이의 논쟁, 즉 ‘무학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학생운동에서 서울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는데, 서울대 총학생회는 무림파였다.
학생운동 노선 논쟁
무림파는 신군부에 대해 “극우반동의 구실을 주지 말되 학원 내에서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 개헌─선거─보수야당의 집권이라는 정치일정이 무난히 이루어지게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반면 국민대 출신의 이태복과 전남대 출신의 윤상원이 주장하는 학림노선은 당시 영향력이 지극히 미약했지만, ‘혁명적이야 한다’는 당위적 주장을 내걸고 학생운동 세력의 적극적인 동원을 시도했으며 노동현장 예비팀을 만들어 노동현장에 가 있는 선배들과 연계시키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소속으로 그 사건을 경험했던 한 학생은 회고담에서 ‘서울역 회군’과 관련하여 무림의 동요와 무기력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예는 1980년 5월12일 쿠데타 루머 때 무림의 대처방법이라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날 오후 6시경 경인지역의 각 대학에는 ‘서부전선에서 남북한간에 대규모 교전이 터졌다. 오늘 밤 안으로 군이 학원에 들어온다’는 루머가 조직적으로 유포됐다. 무림은 “학교를 비우고 귀가하여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서울지역 각 대학에 내렸다. 하지만 이날 지도부의 행태는 13일부터 대중의 맹렬한 비판을 받게 되어 14일 새벽 무림은 ‘캠퍼스 압력론’을 폐기하고 가두시위로 나서게 된다.’
무림사건·학림사건·부림사건
무림 일변도였던 학생운동권의 많은 학생들이 학림노선에 속속 동조하게 됨으로써 ‘무학논쟁’은 질적으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즉 본격적인 정파투쟁, 다시 말하자면 노선의 차이에 근거한 정파투쟁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학림은 ‘무림으로부터의 개종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수배중인 무림조직원들을 동원하여 81년 봄학기에 서울대 시위를 주도했다. 또한 이 기간에 전국적으로 약 20여건의 학원시위를 만들어냈다.
80년 12월11일 서울대생들이 학생식당과 도서관 앞에서 ‘반파쇼 학우 투쟁선언문’을 살포하면서 교내 시위를 전개해 9명이 구속되고, 이후 80명의 학생이 연행돼 장기 수사를 받은 사건을 소위 ‘무림사건’이라 한다. 81년 6~8월 5공 정권의 집중수사를 받아 ‘학림’ 그룹 학생 12명이 구속된 사건을 소위 ‘학림사건’이라고 하며, 이 수사과정에서 발단이 되어 부산에서 ‘부림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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