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반도를 주된 대상으로 하여 일본의 군사행동 범위를 확대시킨 미-일 신가이드라인 관련법의 성립,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던 히노마루와 키미가요의 법제화, A급 전범이 묻혀있는 야스쿠니신사의 국영화 시도, '평화헌법'의 개악 추진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한국의 외교통상장관까지도 일본의 '우경화'를 +입에 담게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천황의 방한을 요청하는 목소리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10월에 방일한 대통령과 지난해 11월 및 올해 9월에 방일한 총리는, '제1의 우호국 국가원수 의 방한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며 거듭거듭 천황의 방한을 요청했다. 또한 그들은 '천황의 방한은 한일관계의 획기적 전기가 될 것'이라며 천황의 방한을 기정사 실화하는 발언을 기회있을 때마다 쏟아 놓고 있다.

이와같은 한국의 놀랄만한 '이중적'인 모습은 누구보다 일본인들을 크게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다름아닌 천황이 그 '우경화'의 중심에 '실질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황은 일본제국주의의 머리였다. 최고의 권력자로도 모자라 '살아있는 신'으로까지 떠받들 어진 존재였다. 그리하여 한반도를 35년간이나 강점하면서, 빼앗고 두들겨 패고 끌고가고 강 간하고 이름과 말까지 바꾸도록 강요하게 한 것도 다름아닌 '천황폐하'였다. 천황이야말로 한일간에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핵심인 것이다.

물론 패전후 천황은 '신'으로부터 '상징'으로 내려 앉혀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합 국의 압력에 의한 것일 뿐이며, 일본 자신이 천황의 책임이나 천황제의 문제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한번도 없다. 오히려 '상징천황'은 일본의 패전전과 패전후를 '단절' 없이 이 어주는 이름 그대로 애매한 고리였다. 바로 이것이 일본의 무책임성의 근본적인 원인이다.일본이 패전전의 죄과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 죄과를 잘라내지 않은 채 패전후를 꾸려 온 때문이다. 패전전의 죄과의 인정은 곧 그 연결고리인 천황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천황'은 그 애매성 만큼이나 불안정한 고리이기도 하다. 일본의 내부와 외부에서 패전전의 죄과를 추궁하는 압력이 세어지면, 그 고리는 '단절'을 위해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압력이 약해지면, 그 고리는 더욱더 단단히 패전후를 패전전에 밀착시키 게 될 것이다. 그 점에서 일본의 진보세력과 한반도는 일본의 '과거밀착'을 막고 있는 소중 한 장벽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의 진보세력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런 마당에 한반도마저 그 장벽을 무 너뜨린다면 천황을 고리로 하는 일본의 '과거밀착'은 거침없이 진행될 것이다. 실제로 최근 의 일본의 '우경화'는 일본의 진보세력의 침체와 함께, 지난해 방일한 한국의 대통령이 천황초청 만찬회 답사에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담지 않는 등 과거청산의 '종결'을 인상 지운 데 기인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천황이 패전후 유일하게 발을 들여 놓지 못한 한반도가 천황을 '반가이' 맞아 들인다면 그 결과는 실로 심각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보수 우익에게는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고 과거의 죄과를 최종적으로 봉함하는 감격에 찬 의식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한국의 과거청산 요구는 물론이고, 안간힘을 다해 과거청산을 대일 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는 북한까지도 어이없이 주저앉게 만드는 결정타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한반도 의 사람들은 청산을 요구해야 할 피해의 역사를 어리석게도 스스로 묻어버린 '추한 한국인' 이라는 오명을 영원히 짊어져야 할 것이다.

한일간의 과거청산이 진정으로 종결되는 그 날까지, 일본이 강점의 불법성을 완전히 인정하고, 책임자를 철저히 처벌하고, 손해를 모두 배상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완벽한 조치를 취하 는 그 날까지, 천황이 이 땅을 밟게 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