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개혁하는 방안으로 학부제와 교수 평가제 등의 제도 개선과 함께 '국제화' 또는 '국제협력'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고도의 첨단 지식을 기반으로 국경을초월한 치열한 경쟁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대학의 국제화 노력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교육부가 주도하고 있는 대학 개혁 방안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대학의 국제화에 대한 개념도 그렇게 명백하지는 않은 것 같다.

대학의 국제화를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가 몇 가지 있다. 대학에서의 전공 강의를 국제어인 영어로 한다거나, 언어나 지역학 또는 국제관계학 전공을 가르치는 국제대학원 을 설립한다거나, 단기 또는 장기의 인력 교류를 활성화한다는 등이 그런예다.

그렇지만 우리말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전공 지식을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가르쳤을 때의 결 과는 쉽게 짐작이 된다. 그런 정책은 우리말의 중요성을 완전히 무시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 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문화의 발전을 가로막아서 오히려 국제화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대학의 국제화는 기업의 경우처럼 단순히 외국의 자본이나 기술을 끌어들이거나 외국에 분교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미국의 일류 대학을 우리 나라에 그대로 옮겨 오더라도 그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으며, 외국에 분교 설치는 의미가 없는 일이다.

미래 사회의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대학은 그 사회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바탕으로설립되고 운영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의 대학은 일본인이 남겨 둔 껍데기에 갑자기 밀려온 낯선 미국식 조직을 뒤섞어서 만들어진 모습이다.
거기에 대학을 신분 상승의 효 율적인 도구로 여기는 사회 인식이 보태지면서 우리의 대학은 제 모습을정립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에게 알맞은 대학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되어 야 하고, 대학의 개혁은 물론 국제화도 바로 그런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미래 사회의 인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하고 깊이 있는 전문 지식이다. 지식 기반 사회에서 국제화의 척도는 영어 실력이 아니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도의 전문 지식에 의 해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세계적인 석학으로 존경받는 이유는 그가 물리학에 대한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그는 신체적인 장 애 때문에 한 마디의 영어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국제화된 대학은 최고의 전문 지식을 우리의 문화와 전통의 범위 안에서 가장 효 율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자신의 지식을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언어 와 컴퓨터 통신 기술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도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 니라 그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대학이 정보 교환의 수단만을 가르치는 곳이어서도 안 되고, 외국인과의 사교장이나 유학 알선 기관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지금 당장 우리 스스로의 독창적인 노력만으로 그런 대학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외국의 일류 대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처럼 무비판적으로 외국 대학 의 껍데기만 베껴오는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외국의 일류 대학을 성공하도록 만든 교육, 연구, 그리고 대학의 운영 기법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철저하게 분석한 후에, 우리의 사회에 알맞은 꼴로 변형하여 접목시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외국의 대학이 그런 귀중한 노하우를 아무에게나 공개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래서 서 로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긴밀한 국제협력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 신뢰를 구축 하기 위해서 교수와 학생의 교류가 필요한 것이다. 영어 강의나 무분별한인력 교류는 비효율과 낭비일 뿐 진정한 국제화의 방안은 될 수가 없다. <이덕환(李悳煥),서강대 화학과 교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