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51년째이고 내년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획기적 해이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냉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국가보안 법을 폐지하는 것이야말로 남북간 소모적 대결을 청산하고 우리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되 도록 하는 데 핵심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신부님들의 단식농성을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 다. 1백20여개 단체가 모여 '국가보안법 철폐 범국민연대회의'를 결성했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도 지난달을 국가보안법 철폐운동기간으로 정해 서명과 농성을 했다.
때마침 여당에서도 지난달 24일 북한을 겨냥하는 '정부참칭' 문구를 삭제하고 제7조(고무 찬 양)도 대폭 개정하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은 단순히 소수 진보인사들이나 운동권 학생들의 인권억압 차원을 넘어서서 국민들의 의식과 일상행동을 지배함으로써 소수 지배층을 제외한 국민 대부 분을 피해자로 만드는 시대착오적 악법이다.

첫째, 북한의 위협은 과거에는 분명히 있었지만 지금은 허구화됐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의 힘이 남한을 앞섰고, 북한은 무장공작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량난 등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의 북한은 남한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현실 적 힘을 상실했다. 오히려 국보법의 주된 겨냥은 국내의 반대파 억압에 있다.

둘째, 양심·표현·학문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의 억압으로 인해 문제를 지적하고 시정하는 구조가 마비된 결과 대단히 불안한 사회가 됐다. '말많으면 빨갱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 는 분위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은 할 말을 하지 못했고 문제는 누적되어갔다.
권력자 부패와 정경유착이 보편화됐고, 사유재산 절대주의로 학교, 병원 등도 사익추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박정희 시대에도 국가보안법과 유신체제로 오늘보다 더 억압적이 었지만 아직 자본주의체제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도 경제성장과 생활수준 향상이 가 능했다.

그러나 이제 한국경제는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경제가 됐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기능이 억압된 결과 재벌체제 심화 등 경제구조의 모순이 누적되었 고, 결국 IMF 사태와 같은 경제공황이 터지고 말았다.
이제는 문제를 지적하고 시정을 추구할 수 있는 인권의 보장 없이는 다수 국민들의 경제적 생존도 어려워지는 상황으로 접 어든 것이다.

'나는 국보법 문제에 관심이 없다. 가만히만 있으면 피해를 입지 않을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많은 분들에게 묻고 싶다. 세계최고의 지가와 주거비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경제 공황을 피해갈 수 있는가. 다리가 무너지고 가스가 폭발하면 피할 수 있겠는가.
인천 호프집에 갔던 고등학생들이 화재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은 것도 국가보안법의 비호 때문이며 우리 국민들이 업주와 공무원들의 황금제일주의를 제대로 견제하고 시정하지 못했기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이제 고도로 복잡한 자본주의 경제구조와 기술시스템을 가진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을 폐 지하는 것은 안전장치를 갖추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보자.

- 장상환 교수(경상대 경제학·민교협 공동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