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인문학 위기를 타개하고자 내놓은 200억 규모의 지원사업 ‘인문한국(Humanities Korea)’이 선정과 지원방식을 두고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이 지난 14일 선정한 연구소는 인문연구분야 대형연구소(연 10~15억원 지원) 6곳, 인문연구분야 중형연구소(연 5억~8억원 지원) 10곳, 해외지역연구분야(연 5억~8억원 지원) 3곳,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받은 유망연구소 11곳 등 모두 30곳이다.
신청 마감일인 지난 8월 말까지 153개 연구소가 사업 신청서를 제출해 치열한 경합을 벌였고, 123개 연구소가 쓴맛을 봤다.
200억이란 돈은 분명 연구비에 목마른 인문학에 단비가 되었지만, ‘단비’를 뿌릴 곳을 선정하는 방식과 뿌리는 방법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학계, “프로젝트 방식은 상업화 우려” 강력 반발
원로 인문학자인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는 학진이 구사하는 ‘선택과 집중’ 방식에 대해 “60년대 과학육성을 목표로 시작한 전략을 어떻게 인문학에 적용하느냐”고 비난했다.
그는 이른바 ‘프로젝트 방식’으로도 불리는 학진의 지원방식에 대해 “대학과 연구자들을 한 순간 돈의 홍수로 유혹하고 전국 거의 모든 대학들을 당첨 여부에 전전긍긍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방식의 사업은 결코 국가가 할 일이 아니며, 이런 방식이 계속될 경우 학문의 다양성을 위축하고 학문 분야의 개별적 특수성을 일거에 무력화하는 폐단을 낳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학진이 선정 기준으로 내세운 학술 등재지 평가에 대한 비난도 이어지고 있다. 등재지 정책은 98년 시작 당시 57개에 불과했지만 2001년에는 109개(등재후보지 428개)로, 5년 뒤인 2006년에는 등재지 902개(후보지 533개)로 무려 25배가량 증가했다.
김원 사회문화연구원노동사연구소 연구교수는 이에 대해 “등재지가 25배 늘어난 만큼 그만한 질적 발전이 있었나?” 묻고 “등재지에 실린 논문의 숫자로 연구 성과를 평가하는 정책은 한편으로 연구자의 창조적이고 질 높은 연구를 저하시켰다”고 꼬집었다.
등재지에 글을 몇 개 실었느냐가 교수 임용 관문이 되면서 등재지가 연구자들의 ‘경력관리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이에 대해 “학진의 등재지 관리 정책을 전향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로 폐지가 불가능하면 이제 ‘최소한의 기준’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진의 자본 공룡화가 문제다”
이러한 위기론의 방향은 모두 학진의 거대화에 맞춰져 있다. 인문학계는 인문한국 뿐 아니라 BK21, 누리사업 등 다른 분야까지 상당한 지원사업을 추진하는 ‘공룡’ 학진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러한 문제는 불거질 것이라 비판했다.
오창은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이에 대해 “학진의 지원 규모가 커질수록 그 권위가 강화될 수 밖에 없다”며 학진의 태생적 문제를 제기했다.
몸집이 커지면서 연구자들이 학진을 비판하기를 꺼리는 일도 문제로 꼽았다. 학진의 권위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학진에 대한 비난은 곧장 예산 삭감으로 이어지고, 향후 프로젝트 선정·수행 과정에도 어려움을 겪어 몸을 사리는 행태가 만연한다는 것.
오 연구위원은 이와 같이 비대해진 학진을 가리켜 ‘학문 제국’이라고 평했다.
그는 “사정이 이렇다보니 ‘국제화에서 한국의 역할’과 같은 학진의 ‘입맛’에 맞는 연구들이 연구과제로 다수 선정되고, 각 대학 시스템마저 학진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이러한 ‘학진효과’ 때문에 그동안 각 대학이 박사 후 과정제도를 운영하거나 의미 있는 연구소를 집중 지원하다가 축소하거나 없앴다고 걱정했다. 대학 자체 프로그램은 삭제됐고, 특성화 계획은 폐기한 채 학진의 지원만 바라보는 셈이라는 뜻이다.
오 연구위원은 “그동안 합리화라는 이유로 학문제도 재편과 관련된 모든 현안을 학진에 집중시켰다면 이제는 영역을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술연구재단 혹은 학술연구원 설립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장학재단을 연구재단이나 학술재단 형태로 유도해 전문 학술연구자들을 채용하는 민간 형태의 ‘전문학술 연구원’이 활성화한다면 학문 발전과 학문후속세대의 고용 창출 효과도 크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축-살 모델 등 새로운 방식 개발해야”
박정원 상지대 교수는 학진의 지원방식인 ‘선택과 집중’에 대해 “연구 분야처럼 단기적 성과를 못내는 분야들이 묻힌다”면서 선정 방식부터 바꾸자고 제의했다.
여러 연구팀 중 하나만 선정되고 나머지 탈락되면 부익빈부익부가 심화되는 이른바 ‘마태효과’가 발생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승자독식 방식보다 분산된 작은 연구 역량도 함께 묶을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하다”며 ‘축살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자전거의 바퀴처럼 중심 ‘축’이 있고 그 주변에 ‘살’이 밀집한 형태다. 중심대를 축으로 협력대가 참여하는 모습으로, 작은 학교들이 소외 받지 않고 모여서 연구역량을 집중할 수 있다.
이 방식은 ‘Hub&Spokes 모델’이라 불리며, 스코틀랜드에서 추진하고 있어 ‘스코틀랜드 모형’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개별 대학교는 규모가 작아 한 대학이 모든 연구진을 갖출 수 없으니 대학이 연구를 중심으로 새롭게 모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이 뭉쳐 공동으로 기금을 타고, 하나의 연구진을 구성하면 막강한 힘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한편, 학술단체협의회는 학진이 일률적인 잣대를 버리고 다양한 연구지원 방식을 도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학술단체협의회는 “인문학을 반드시 집단으로 연구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며 개인 과제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등재지 뿐 아니라 <창비>나 <황해문화> <시민과 세계> 등 연구자와 일반인에게까지 인정 받는 학술 잡지도 학진이 껴안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 잡지들이 인문학의 대중화에 공헌을 하고 있지만 학진은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고 있으며, 실리는 논문도 연구 업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기사1> “세계적 인문학 연구소 만드는 게 인문한국 목표” [인터뷰] 성태용 학진 인문학 단장(건국대 철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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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2> 외국의 인문학 지원 기구 |
미국은 인문학의 전 분야는 물론, 지역사회의 각종 문화활동과 초·중·고 교사와 학생들을 위한 인문교육체제에 걸쳐 상당한 지원을 하고 있다. 그 정점에는 ‘국립인문재단(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 : NEH)이 있다. 총 27개 부서이며, 38개의 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개인이나 단체는 프로그램에 명시된 자격조건을 갖춘 후 정해진 마감일까지 지원하면 된다. 영국 ‘인문예술연구회(Art and Humanities Research Council : AHRC)’는 예술과 인문학을 전담지원하는 연구지원회의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만든 AHRB가 승격한 기구다. 대학의 인문학과 예술 연구자(연구소 포함)를 지원하고, 인문학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일 등 영국 인문학 진흥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프랑스 국립학술원(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 CNRS)은 1939년 대통령령으로 설립해 기초학문 분야 및 응용 학문 분야의 국가 연구기관들을 하나의 기구로 통합, 국가 차원 상호협력 연구를 가능하기 위해 만들었다. 약 2만6000명이 일하고 있으며, 이 중 1만1600명이 연구원이다. CNRS에 소속된 1260여 개의 서비스 및 연구단위은 전국적으로 산재되어 있고 전 학문 분야를 다 포함하고 있다. 독일은 연방정부와 16개 주 정부가 각각 학문성, 또는 교육부를 갖고 있으며, 각 주는 교육에 관한 한 자주권, 이른바 교육자주권을 지니고 있다. 이런 자주 형태 위에는 학문위원회(Wissenschaftsrat)가 독일의 연방과 주 정부들 간에 일어나는 주요 학문정책의 쟁점이나 현상에 대해 권고안을 내고 전체 국가발전을 위한 대학 개혁, 또는 학문 전반의 문제점에 관해 의견서를 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