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 홈 > 뉴스 > 대학행정

목록
프린트 스크랩
첫 단추부터 잘못 낀 문교 행정 <1>교육부 수장
파벌갈등, 학벌에 치이고...지역에 밀리고
정부수립부터 장관따라 계파형성...해방 후 친미세력이 장악
군사정권 아래 억압·통제...참여정부에서도 관료권력 '여전'
‘진주마피아’니 ‘서울사대파’니 하는 별칭으로 유명세를 떨쳐온 교육인적자원부의 파벌 갈등은 뿌리 깊은 유래가 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문교부, 파벌과 인맥에 좌우되는 교육부 구태의 기원은 어디인가?

●초대 문장욱 차관 사퇴, 교육부 파벌 갈등 시발

교육부 파벌의 시발이 된 학맥, 인맥 갈등의 기원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맥 싸움으로 빚어진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과 문장욱 차관의 갈등, 취임 두 달 만에 차관의 자진사퇴까지 불러왔던 문교부의 첫 파벌 갈등의 기원은 이렇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 출신이었던 안 장관은 취임 직후 문교부 인맥이 미 군정 이래 주류를 형성해 온 연희전문 일색으로 꾸려진 데 불만을 갖고 서울대 및 보성전문 출신 인사들로 대체하는 작업을 단행했다. 그러나 연희전문 출신 문장욱 차관은 안 장관의 ‘자기 사람 심기’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이에 반발 취임 65일만에 자진 사퇴했다.

서울대, 보성전문(현 고려대) 위주의 교육부 인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안 장관의 후임으로 백낙준 연희대(현 연세대) 총장이 2대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백 장관은 미군정시 조선교육심의회 일원으로 교육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 미군정 학무국에 연희전문 계파를 심었던 장본인이나 다름없었다.

백 장관은 정부 수립 후 1년9개월여 동안 보성전문·서울대·경남지역 인맥을 중심으로 했던 안호상 체제를 전면 물갈이하고, 광복 직후 유억겸, 오천석으로 이어졌던 연희전문 및 이북출신을 대폭 기용했다. 차관으로는 최규남 당시 과학교육국장이 발탁됐다. 훗날 5대 문교부 장관까지 올랐던 최 차관은 연희전문 수물과 출신이었다.

●‘조지피바디’, 교육계 친미엘리트 계열의 횡포

1948년부터 2005년 현재까지 역대 교육부장관 48명 중 3명이 미국 조지피바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8대 서명원, 29대 김영식, 30대 정원식에 이르기까지 1987년~1990년 3년 동안 조지피바디 출신자들이 대한민국 교육부 조직을 좌지우지 했던 것은 과연 우연일까?

일제 식민시대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도미유학파들은 해방 이후 미군정의 요원과 통역, 자문 등 고위관료로 활동하며 친미파의 핵심을 형성했다. 교육계에서는 미국 파크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백낙준 장관과 코널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오천석 장관 등이 정점에 있었다. 이들은 미군정 학무국장을 맡았던 락카드 대위 지근에서 대한민국 교육계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교육계 친미 엘리트들은 미국의 교육원조로 맥을 잇게 된다. 특히 1956년 ‘피바디계획’에 따라 문교부 행정관리 등 교육계 종사자들의 도미유학을 적극 추진한 결과 60년대 이후 교육학계는 피바디 인맥이 압도했다.

피바디계획에 의해 한국에 파견된 피바디측 전문가는 총 39명, 한국측에서 피바디에 파견된 유학생은 82명이었고, 관리직 워크숍 참가자는 1백50명에 달했다. 피바디로부터 교육 세례를 받은 당사자들은 미국 교육을 한국에 도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피바디의 그림자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교육계에 짙게 드리우고 있다.

1974년 현재 피바디대학 유학자 중 교육학 분야 학위취득자들은 서명원, 김영식, 정원식 장관을 포함해 30명. 이들은 교육권력의 정점인 교육부 장관직을 비롯해 서울대 연세대 공주사대 광주교대 안동교대 이화여대 등과 서울·경북교육감 등 교육계 요직에 포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철학 없는 교육정책, 대학 견제로 일관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기간 동안 교육계는 ‘철학’보다는 ‘군대식 가치관’이 지배해왔다. 4·19혁명으로 높아진 민주주의 의지를 꺾고 쿠데타를 통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부의 교육정책은 4·19혁명의 핵심 세력인 학생 집단을 견제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군부는 특히 국·공립대 총장 이하 학장의 임명제, 교육자격심사위원회의 대학교원 채용과 승진에 대한 자격심사, 각급 교원의 노동운동 금지, 사립학교 교원에 대한 통제 강화, 교원에 대한 자격심사 강화, 학생에 대한 학사자격고시 등으로 대학 교직원과 학생들을 통제했다.

정점에는 당시 정권수립에 ‘브레인’역할을 했던 교수 및 ‘수족’이 됐던 군인 출신 문교부 장관들이 있었다. 5·16 쿠데타 직후 들어선 내각의 문교수장 문희석은 해병대 작전참모였다. 당시 나이 40세로 역대 교육부 장관 중 최연소라는 기록을 남긴다.

19대 홍종철은 5·16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육사 8기 출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었다. 홍 장관은 교육부장관에 오르기 전 17대 문교부 차관, 7대 공보부장관 등을 거쳤다.

12대 박일경, 15대 윤천주, 17대 문홍주 장관은 당시 군정의 브레인이었다. 이들은 국가재건기획위원회,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윤천주 장관은 특히 중앙정보부 정책연구실의 핵심 멤버였다.

●“나를 바지저고리 장관으로 만들지 말라”

국민의 정부 들어 교육부장관의 임기가 짧아지면서 교육부에서는 ‘물정 모르는 장관 손님과 노회한 관료’ 사이에 특수한 역학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진주사단’, ‘서울사대파’ 등 지연 및 학연으로 공고한 파벌을 형성한 관료들이 1년 남짓 다녀가는 장관들을 흔드는 사실상의 실세 역할을 뚜렷이 했다.

교육부에서 ‘진주사단’이라는 계보가 형성된 것은 1980년대 부터. 진주 출신인 이규호 장관과 진주사범 출신인 정태수 차관 시절, 진주 인맥이 교육부 요직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당시 교육부는 ‘진주시 문교부’로 불릴 정도로 진주 출신 세력이 대단했다.

최근 들어서는 서울사대파가 득세하고 있다. 2대 부총리 이상주, 42대 장관 이돈희, 40대 문용린, 33대 오병문 30대 정원식, 29대 김영식 등 장관은 물론, 교육인적자원부 4대 차관 서범석, 3대 차관 김신복, 2대 최희선, 교육부 41대 차관 이원우, 38대 장기옥, 32대 김찬재 등 차관들까지. 진주사단의 뒤를 이어 교육부 요직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참여정부 첫 교육부 수장을 지낸 윤덕홍 3대 교육부총리는 취임식에서 “진주마피아니 서울사대파 얘기가 안 나오게 하자. 나를 바지저고리 장관으로 만들지 말라”며 교육부 내 파벌 과 경직성에 정면대응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등 교육부 개혁을 내세워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윤 부총리가 뽑아든 개혁의 칼날은 교육부의 철옹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으로 인한 교육계 갈등, 수능파문 등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지만 이면은 윤 부총리가 NEIS 재검토 쪽으로 방향을 튼 데 대해 교육부 내에서 조직적인 항명이 인 결과였다는 지적이다.

“사실 교육부 개혁 문제는 참여정부 출범 이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차원에서도 ‘교육개혁은 교육부 개혁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공론의 장이 형성됐다. 이런 아이디어를 받은 정부가 출범하면 제대로 될 줄 알았는데 역시 관료권력에 폴(fall)된 형국이다.”

참여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용일 한국해양대 교수가 진단한 현정부의 교육부개혁 결과다.

대학 개혁이 최대 화두로 대두되고 있지만 정작 대학가에서는 정작 교육 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교육인적자원부와 관료사회 경쟁력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실정이다. 일부에서는 ‘교육부 무용론’ 마저 나오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 이제야 말로 뼈를 깎는 개혁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김은영 기자 (news@unn.net) | 입력 : 05-03-21 오후 2:48
ⓒ 한국대학신문(http://unn.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목록
프린트 스크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1

최신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