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활동 관련 기자회견장에서 그를 가끔 만날 수 있었다. 해당 사안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고 동향을 전해듣기도 했다. 3년째 알고 지낸 셈이다. 지난 19일 연세대에서 오랜만에 다시 그를 만났다. 처음으로 그의 실명과 소속 대학을 알았다. 그는 7년째 수배 중이었다.
그를 비롯한 한총련 수배학생들이 공개적인 활동에 나섰다. 한총련 관련 정치수배 해제를 위한 모임(대표 유영업 5개 한총련 의장권한대행ㆍ97년 목포대 총학생회장)은 지난 6일 연세대에 ‘정치수배 해제를 위한 사무실’을 개소한 데 이어 19일에는 ‘정치수배자 공개 건강검진과 정치수배 해제 촉구를 위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국보법 위반 혐의 등으로 수배자인 이들이 거주지와 얼굴 등을 모두 언론에 공개했다. 치명적인 일이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점점 악화되는 수배 학생들의 건강문제를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었다는 판단이었다.
유영업 군은 “수배학생들은 주로 각 대학 학생회관에 작은 생활방은 마련해 잠자리를 대신하고 대학 화장실이나 작은 샤워실에서 씻는 것을 대신한다”며 “불규칙한 식사와 긴장된 생활, 수면부족, 수배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심근염, 시력상실, 이명증, 허리디스크, 위장병 등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유 군은 “부당한 정치수배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공개건강검진을 시도할 계획”이라며 "가장 좋은 치료는 비싼 약이 아니고 수배해제"라고 말했다.
한총련 관련 정치수배 해제를 위한 모임이 수배 학생들에게 건강검진 신청을 받았다. 모임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수배에 따른 스트레스, 무기력증, 대인기피증 등 정신적 치료를 요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누군가에 쫓기는 꿈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수배생활 5년째인 박제민 군(경기대 경영4)은 악성근시로 시력이 조금씩 감퇴되고 있다. 최근에는 다리 골절을 당해 지인의 도움으로 수술은 받았지만 물리치료는 못하고 있다.
수배 3년째인 주진완 군(2002년 동국대 총학생회장)은 해병대 제대, 마라톤 완주 경력의 건강 소유자였다. 하지만 수배생활 끝에 이명증을 얻었다. 이유없이 귀에서 ‘윙’ 소리가 나는데 수배생활이 길어질수록 소리도 더 커져 최근에는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몰래 진단을 받아본 결과, 이 상태로라면 30대 중반쯤 청력감퇴로 심각한 상황에 이를지도 모른다.
김정숙 양(2001년 연세대 사회대회장)은 수배생활 3년만에 위궤양ㆍ위염 등 소화기 계통 장애와 허리통증을 얻었다. 학생회관에 마련된 생활방에서 기거하는데, 자리가 없어 소파에서 자다 일어나면 다음날은 종일 허리를 펴지 못한다. 후배의 의료보험으로 병원진단을 받아보니 장기치료를 요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치료는 포기했다.
한총련 관련 정치수배 해제를 위한 모임 대표 등으로 연세대에 둥지를 튼 ‘선배 수배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올해로 수배 7년째인 유영업 군은 한동안 사람을 일일이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교내 학생식당에서도 습관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확인하다 현기증에 시달릴 때도 있었다. 수배자가 된 이후 은행업무는 전혀 볼 수 없었고, 수배생활 초기였던 99년에 허리통증으로 2년 동안 몰래 남의 이름으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송용한 군(고려대 서창ㆍ5기 한총련 간부) 역시 7년째 수배 생활을 하고 있다. 비염을 앓고 있지만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90년대 후반 즈음에는 1년 내내 전화를 한 통도 사용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 지금은 상황이 좀 나은 편이지만 통화가 30초 이상 넘어가면 본능적으로 불안하다.
수배 3년째인 이산라 군(2001년 단국대 총학생회장)은 2001년 학생회장 활동 중 무릎을 다쳤지만 치료를 받지 못해 무릎관절 통증을 겪고 있으며 소화기 계통 장애도 있다.
송군은 “힘든 수배생활을 하다보면 차라리 형을 받는 게 나을까 싶을 때도 있을 정도”라며 “하지만 후배들까지 관행적으로 수배자가 되는 우리의 현실은 ‘인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현재 한총련 계열 학생들이 대학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등에 당선되면 당연직으로 한총련 대의원이 되고 바로 수배자가 된다. 매년 3백~4백명씩 수배자가 양산되는 셈이다.
수배학생들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의 도움을 받아 오는 25일 전남대를 시작으로 연세대, 단국대, 덕성여대, 경희대 등에서 건강검진을 실시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50여명의 신청자가 접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