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하반기 극장가는 벌써 전설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매트릭스 3>의 최종판이 무색하게 와신상담하며 재기를 노린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를 위시해, 타란티노의 6년 만의 재기작인 <킬 빌>, ‘반지 전쟁’의 최종판인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등, 막 뚜껑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화제작들의 위용은 벅찰 정도다.
18세 이하의 금기를 벗어난 여러분들에게 이 화려한 하반기의 개봉작 중 몇 편을 골라 소개한다.
<낭만자객>, 코미디와 퓨전한 <천녀유혼>
감독: 윤제균
주연: 김민종, 최성국, 신이, 진재영 등
개봉일: 12월 5일
대대로 홍콩영화를 향유한 건 '아웃사이더'들이었다. 60년대 [쇼브라더스] 영화들로부터 80년대 느와르까지, 주로 변두리 3류 극장에 몸을 내걸었던 홍콩영화들은 그곳을 찾는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의 손에 '발견' 되었던 것이다.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경계인으로써 주류에 결코 편입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즉 '재수생' 윤제균이 그 시절에 발견한 영화는 <천녀유혼>이었다. 그것은 일견 당연했다. <촉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중국의 무술과 SFX를 절묘하게 결합한 서극의 <천녀유혼>은 말 그대로 '아트'였으므로. 더구나 사라사 옷자락을 휘날리며 우아하게 쌍수를 펼쳐대던 왕조현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살풋, 수줍은 미소를 흘리는 청순한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하늘하늘한 베일로 둘러쳐진 목간통 속에서 어른거리는 왕조현의 등선은 뭇 남성들의 가슴을 뒤흔들기에 적이 충분했다.
'아니 이렇게 화려하고 놀라운 무협영화가 있다니! 왕조현은 우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윤제균은 왕조현과 <천녀유혼>에 단숨에 매료됐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첫사랑의 기억처럼 아련하게 가슴에 남아있다가 IMF를 핑계로 무작정 직장을 박차고 나와 시나리오 작가로, 또 ‘감독’으로 보직을 변경한 윤제균의 세 번째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바로 <낭만자객>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비록 <천녀유혼>에서 모티브를 빌려왔다고는 하나 <낭만자객>은 철저히 윤제균의 영화이다. 즉, <천녀유혼>의 외피를 두르기는 했으나 ‘얼빵한’ 자객단이 처녀귀신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벌이는 윤제균식 ‘퓨전 사극 코미디’가 <낭만자객>인 것이다. 이 같은 조짐은 캐스팅에서부터 이미 감지되었다.
최성국, 신이, 진재영, 황신정, 주명철 등 윤감독의 전작 <색즉시공>에서 코미디 감각을 뽐낸 바 있는 배우들이 <낭만자객>에 ‘리로디드’되었고 여기에 김민종, 김흥수 등 ‘뉴 페이스’가 힘을 더했다. (윤제균 감독이 ‘민종아 사랑해’라는 문자 메시지를 날려 <나비> 이후 두문분출하던 김민종을 낚아채온 건 이 바닥에서 유명한 일화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자객단과 처녀귀신의 이름이 각각 ‘용’ ‘각’ ‘산’과 ‘비’ ‘풍’ ‘초’ 라는 것, 왕조현에 비견될 진재영과 신이가 욕쟁이 터프귀(鬼)라는 것,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주리아나(酒利亞羅)’라는 나이트클럽이 있었다는 것 등의 설정은 <낭만자객>이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짐작케 하는 주요 코드가 된다.
6월 20일 크랭크인 하여 감독과 스텝들이 부상투혼을 발휘하면서까지 가열차게 촬영한 <낭만자객>은 지난 10월 21일 크랭크업한 후 현재 후반작업중이다. 제작진들 사이에서는 ‘대박’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지만 팔은 안으로 굽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쁜 법!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 판단은 유보해야 옳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확언할 수 있는 건, 지금의 트렌드하에서 <낭만자객>은 상당히 유효한 상품이라는 것 뿐이다.
충무로 안팎에 폭풍처럼 불어 닥친 사극 열풍. 그간의 추이를 지켜 보았을 때 ‘정통’ 보다는 ‘퓨전’이 강보합세이다. 진지하게 ‘가오’를 잡았던 <청풍명월>이 철저히 관객들의 외면을 당한 반면, 적당한 코믹코드와 와이어 액션을 (사극 안에서) 파격적인 카메라 워크로 담아낸 드라마 <다모>와, 바로크풍 BGM으로 ‘퓨전’임을 노골적으로 공언한 <스캔들>이 수많은 ‘폐인’들을 거느렸던 것은 그것을 증명한다. <청풍명월>이 재미나 완성도면에서 여타의 작품에 비해 뒤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사극의 퓨전화는 부정할 수 없는 추세이다.
윤제균 감독은 이제껏 검증되지 않은 배우들과 함께 ‘웃음’을 무기로 당당히 흥행 신화를 일궈냈다. <색즉시공>이 지독히 반 페미니즘적이었으나 코미디 감각만은 탁월했던 것처럼,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정치적 공정성과 이데올로기가 부재한 대신 인과관계가 비교적 분명한 포복절도의 웃음은 빠지지 않았다. 윤제균 감독의 작품들이 ‘절대반지’와 정면승부에서 매번 밀리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도 역시 <낭만자객>은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과 격돌한다. 역대 전적 2전2무. 막상막하의 전적을 뒤로한 채 윤제균 사단은 절대반지와 12월 5일 세 번째 대결에 돌입할 예정이다. 낭만 자객들이 절대반지 앞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지 제법 흥미롭다.
|
감독: 이광훈
주연: 정준호, 김효진, 김혜리
개봉일: 11월 28일
사극 열풍이 대단하다. <허준> <장희빈> <여인천하> <다모> 그리고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대장금>까지. 연일 보도되는 사극에 대한 예찬(열기)은 좀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 열풍은 드라마에만 국한되어 있다.
최근 종영된 <다모>가 극장판 HD로 제작되었다고 해서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혹은 휘황찬란한 곡예 무술에 현혹됐다 하더라도, 어디 영화에 비할 바 있겠냐만은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때문에 사극들은 신종잡기마냥 변종의 수법을 차용한다. ‘퓨전사극’이라 명명되는 (최근 들어 속속들이 개봉되는 혹은 제작되는) 몇몇 영화들이 그것. 이들은 사극이라는 테두리에 코믹코드를 살짝 삽입하거나 농도 짙은 멜로를 섞어 넣는다.
(아마도 최근 개봉한 <청풍명월>의 경우 남성성이 짙은, 그래서 서사성이 강한 내용을 다수 내포해서 관객동원에 실패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어쨌든, 상업영화이니만큼 관객의 구미를 충족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 하여, (개봉을 앞두고 있는) 원작이 갖고 있는 공포의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년호>(1969년 신상옥 감독 작품)의 여우 ‘호’(狐)를 호수 ‘호’(湖)로 바꾼 것은 충무로 바닥의 생리를 일정정도 예상한 것 아닐까.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천년호>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진성여왕의 통일신라와 그로부터 천년 전인 혁거세의 신라’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천년호>인만큼 당시의 신라를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중국 로케이션을 단행해야 했던 것. 여기에 덧붙여진 ‘천하절경은 찾되, 한국적이어야 한다. 스케일은 있되 중국적이면 안 된다.’는 영화의 절체절명의 과제. 발만 동동 굴렀던 스텝들은 옛 신라의 자취를 담을 수 있는 비경을 찾아 장장 6개월 여 동안 대한민국 면적의 4배에 달하는 저장성 일대를 샅샅이 훑어야 했을 정도. 그렇게 자운비의 집을 세울 수창과 천년호수가 등장할 시티엔무산, 그리고 신라의 궁성이 마련될 헝디엔의 세트장이 완성됐다. 물론 고증을 거쳐 탄생한 1,200여 벌의 의상과 <와호장룡>팀이 만든 신라시대의 소품 등은 부수적인 것이겠지만.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틀을 갖췄으니 이제 남은 일은 뼈대를 세우는 것. <천년호>의 숨은 노력은 바로 이 부분에서 기인한다. 골머리를 앓았던 이광훈 감독은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가 중심이다.”라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앞서 잠깐 언급했듯, 한국 최초의 판타지 호러였던 <천년호(千年狐)>의 ‘한’이라는 한국적 테마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천년호(千年湖)>의 모티브로 삼고, 우리의 이야기로 한국적 판타지 장르를 개척하고 싶다는 이광훈 감독의 포부가 덧붙여져 완성된 것이 바로 <천년호>인 것이다.
<천년호>의 대략 줄거리는 이렇다. 어둠과 주술이 지배하던 부족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국가가 생겨날 무렵, 박혁거세가 이끄는 신라는 신목(神木)을 섬기던 아우타족을 전멸시킨다. 아우타족의 원한과 피는 신목이 서있던 자리에 채워져 커다란 호수로 변하고 아우타족의 주술 기운을 봉인하기 위해 혁거세는 신목 위에 신건(神劍)을 꽂는다.
천년 후… 때는 통일신라 말기 진성여왕대. 끊임없는 전란과 변방의 난으로 신라는 패국의 위기에 처하고 신라의 장군 비하랑(정준호)은 진성여왕(김혜리)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수많은 전쟁에 회의를 느끼던 비하랑은 사랑하는 여인 자운비(김효진)와 조용한 생을 보내고 싶어한다.
비하랑이 역도의 무리를 정벌하기 위해 전쟁터로 출정한 사이 자운비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자객들에게 쫓기게 된다. 자객에게 쫓기던 자운비는 우연히 아우타족의 원혼이 봉인된 천년호에 몸을 던지게 된다.
결국 이광훈 감독의 의도대로 <천년호>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원귀가 된 자운비와 그녀를 기어코 죽여야만 하는 신라의 장수 비하랑, 그리고 그를 연모하는 진성여왕 사이의 멜로드라마가 극의 축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색다른 영화 만들기를 주저하던 90년대 후반, 판타지적 미학을 만들어냈던 <자귀모>와 같이 <천년호> 역시 “인간과 인간의 소통, 그리고 인간과 또 다른 무엇과의 소통”에 대한 화두를 던지면서 <천년호>를 보다 높은 완성도와 화려한 스케일로 포장했다. 그 배후에는 <인생> <상하이 트라이어드> 등을 찍은 촬영감독 뤼에, <더 원> <키스 오브 드래곤> 등의 액션을 연출한 위안더 등 중국과 홍콩의 베테랑 제작진이 가세한 탓도 있겠지만.
<스캔들> <황산벌> 등 이색 관점의 전통 사극 장르가 호황을 맞고 있는 지금 하반기 한국 영화 시장에서 <천년호>의 출발 노선은 기대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캔들>이나 <황산벌>이 장르 보다는 스타 파워와 이색적인 컨셉, 그리고 무엇보다 '코미디'에 기댄 바가 컸다고 할 때 <천년호>가 헤쳐나가야 할 길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홍보사에서는 정준호를 ‘밀고’ 있지만 정준호라는 배우는 ‘전방위적’ 스타라기보다는 그가 거한 영화들의 장르적 특성에 힘입은 바가 크기 때문에 <스캔들> <황산벌>과 비교하기에 애매한 면이 있다.
<천년호>의 진중하고 처절한 이야기를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사극에 대한 관심이 긍정적인 이 때에 탄탄한 스토리 라인과 감정선을 살려 ‘괜찮은’ 사극 판타지를 보여줄 만한 내용물을 담보로 하고 있기에, (추측에 불과하겠지만) <천년호>는 그 어떤 영화와 대적해도 살아 남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