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억겸 : 한말 개화파 태두로 갑오개혁의 핵심인물인 유길준의 둘째아들 유억겸은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연희전문 교수가 됐으며, 부학감, 부교장을 거쳐 해방 후 교장이 되었다.
형 유만겸이 시종 일본 총독부 관료로 출세 지향적이었던데 반해 처음에는 부르주아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유억겸은 YMCA와 조선사정연구회 등 민족주의 계열의 활동에서 이승만 동지회와 연관을 맺었던 흥업구락부 사건이 터져 가담자로 몰리면서부터 '친일군상'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그는 1938년 기독교 조직의 친일회에 가담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제3분회장,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임전보국단 이사, 학도병 종로익찬회, 언론보국회 명예이사 등 일제 말기 친일 단체의 본산에서 자신의 학생들을 전장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했으나 해방 후 미 군정청의 학무국장이 되었다.
● 김성수 : 사가들에게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김성수는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19년에는 경성방직주식회사를,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설립했다. 이후 1945년에는 한국민주당, 1949년에는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1951년에는 부통령에 당선되는 등 교육·언론·정치 등 한국 현대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가지 점에서 친일 행각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이른바 '시국강연'의 연사로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전시동원정책에 협조했으며,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로, 1941년에는 흥아보국단 이사 및 임전보국단의 감사로 활동했다.
1943년에는 당시 보성전문 교장 자격으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징병제와 학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게재하는 등 해방 이전까지 학병을 권유하는 각종 담화와 논설, 학부모 간담회 등에 참여, 친일에 가담했다.
● 백낙준 : 제자를 침략전에 내몰고도 추앙 받는 교육자 백낙준은 미국 예일대학을 나온 엘리트 유학파로, 귀국해서는 연희전문 교수직을 맡으면서부터 친일 연사로 활동해 '나의 길 나의 노래'(1927년)를 발표하는가 하면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참여하면서 친일좌담회인 [미·영 타도좌담회]에서 '대동아전쟁의 숭고함' 등을 역설했다.
특히 당시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와 조선기독교연합회, 기독교신문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3년 12월에는 친일신문인 [매일신보]에 '영원히 광망 뻗도록'이란 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언론과 기독교단체를 통해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는 주장과 논설을 폈다.
그러나 그는 해방후 항일 투사로 미화되면서 1951년에는 문교부장관에, 1957년에는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이 통합된 연세대 초대총장에 오르면서 연세대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으며 1958년에는 반공연맹 아세아지구 의장으로,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 의장에 오르는 등 정계와 교육계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 김활란 : 여성 교육의 대모로 알려진 김활란은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1931년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이화여전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37년부터 총독부가 주관하는 방송선전협의회, 애국금채회 등에 참여했으며, 임전대책협의회, 임전보국단 등 일제의 황민화와 내선일체,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각종 관변단체 간부로 활동하면서 친일 행각을 벌였다.
1941년에는 임전보국단결전부인대회 및 강연회에, 1942년에는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으며, 이화여전 교장으로 있던 1942년 12월 [신세대] 잡지에 '징병제와 여성의 각오'라는 글에서는 '전쟁에 나간 남편이나 아들의 유골을 눈물 없이 맞자'고 주장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논설과 강연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이화여대 총장과 배화학원, 국제대학, 동구학원, 금란여중고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을 맡았으며, 6·25 때는 공보처장, 1965년∼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연맹 이사 등 정치활동에까지 참여, 사후에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기도 했다.
<김우종의 대학비사 200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