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 홈 > 뉴스 > 대학행정

목록
프린트 스크랩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 "통일은 민족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30여년간을 담벼락 높은 교도소 독방에 갇혀 지내다가 지금은 지하 단칸방에 홀로 살아가고 있는 비전향 장기수 김중종 씨(75). 그는 어쩌면 남은 여생도 그렇게 외롭게 보내야만 했을지 몰랐다. 한반도 전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남북정상회담이 없었다면 말이다.

비전향 장기수의 북한 송환 등을 골자로 한 '6·15 남북 공동성명' 소식이 발표된 직후인 지 난 16일 그의 자취방(?)에서 만난 김씨는 조만간 북한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다소 들떠 있었다.

"외세에 의한 민족분열로 인해 고통 속에 살아 왔지만 이제는 가족들이 있는 북으로 돌아갑

니다. 비전향 장기수 북송 대상자 58명 가운데 제가 포함돼 있거든요."

시대의 아픔을 한 몸에 짊어지고 살아온 김씨의 고난역정은 21살 나이에 대구사범학교를 졸 업했던 지난 46년부터 시작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4회 졸업이고 제가 13회이니 9년 후배인 셈입니다. 당시의 한반도는 미군정이 실시돼서 영구분단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나는 반미투쟁에 투신할 수밖에 없었 지요."

오로지 한반도가 두 동강 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가 선택한 길은 좌익단체

인 공산당에 입당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그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미국의 내정간섭 을 반대하는 투쟁에 몰두했다.

"미국이나 구소련이 한반도 해방의 은인일 거란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외세가 이 땅에 들어오는 건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서란 걸 역사가 증명해주지 않습니까."

그는 신라가 3국을 통일하면서 당나라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를 합 친 면적인 70만 평방킬로미터 중 무려 59만 평방킬로미터를 빼앗겼던 역사를 상기시켰다.

"남북한의 통일도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다른 어떤 나라도 이에 개입해선 안됩니다. 그런 점에서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자는 데 합의한 이번 남북정상회담 의 성과는 대단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6·25 전쟁에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전쟁 중 경남 마산에서 부상을 입어 북으로 후송 됐으며 북한에서는 신의주 법률학교를 수료하고 8년간 검사로 재직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 검사로 복무하면서 당시 김일성 수상의 관사가 있는 평양시 서성동에 살았습니 다. 52년쯤으로 기억하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당시 제4인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지요. 비교 적 가까운 거리에서 김 위원장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최근 김 국방위원장에 대한 언론의 떠들썩한 보도를 보면서 다소 씁쓸한 기분까지 느 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 국민들이 김 위원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린시절의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로써는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 닙니다."

그가 증언하는 김정일 위원장의 어린시절 모습은 대략 이렇다. 김 위원장은 국가 통수권자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 수상관저 인근에 사는 친구들과 볏짚 더미 위에서 씨름을 하는 등격의 없이 어울려 노는 성격이었다.

또한 물건이나 먹을 것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나눠줄 줄 아는 다정함과 의리를 가진 학생이 기도 했다. 수상의 아들이기 때문에 여성군관이 항시 그를 따라다니며 호위를 했지만 김 위원장은 그 여성군관을 매우 못마땅해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방해가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반장을 시켜도 극구 사양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학생 때는 대동

강 연안공사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동원돼서 온몸을 꺼멓게 그을려가면서 노동을 하기도 했 고요."

김씨는 정상회담 덕택으로 김 위원장에 대한 그간의 오해가 상당부분 풀린 점을 매우 긍정 적으로 평가했다.

북한에서 검사로 재직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김씨는 왜 남한땅에서 영어의 몸으로 외 롭게 고난의 세월을 이어온 것일까.

"4·19 이듬해인 61년 노동당으로부터 남한에 가서 지하당 조직활동을 하라는 임무를 받고 남파되던 중에 검거되고 말았지요. 그 후 79년까지 18년간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가 청주보 안감호소로 옮겨서 14년간을 더 옥살이하고 89년 10월에 석방됐습니다."

그는 이른바 '인민군'이자 '남파간첩'이었던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 아래였다면 매서운 눈초

리에 어금니 날카로운 늑대쯤으로 묘사됐을 법한 인물이다. 하지만 김씨는 깡마른 체구라서 후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박식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다소 고집스러운 면모를 가진 김씨는 그 긴세월을 옥살이하면서도 남한당국의 전향 요구를 단 한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그는 옥살이 내내 순수우리말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그리고 최근에 '옛말로 풀어 읽는 콸리아(고려의 순수우리말 발음) 고대사', '옛말로 풀어 읽

는 우리이름, 우리문화', '콸리아 말로 풀어 읽는 일본 상고사' 등 3권의 저서를 탈고했다.

"얼마전 국내 모출판사와 출판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조만간 시중에 책으로 출간이 될 것입니다. 북으로 돌아가면 거기에서 학위도 받고 책도 펴낼 생각입니다."

김씨는 스스로가 순수우리말 연구에 천착해 온 이유에 대해 "우리 옛말이 점차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상황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한자와 외래어 탓에 순수우리말의 상당부분이 사라졌습니다. 또한 순수우리말을 알고 있다해도 그 연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가령 순수우리말인 '서울'의 뜻을 아는 사

람은 많지 않습니다. '서'는 서다는 뜻의 동사이고 '울'은 우리를 뜻하는 체언입니다. 그래서 서울은 '우리에 서다'가 됩니다."

김씨는 앞으로 자신에게 남은 여생을 온전히 우리말 연구에 바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머지 않아 김씨는 순수우리말 연구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변모시킬 수 있을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김씨의 현재 생활은 녹녹치 않다. 그의 한달 수입은 경로연금 3만원과 거택보호연금 15만원이 전부다.

하루 세끼 식사는 종교단체의 후원을 받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지하 단칸방의 전세금 2천만원은 89년 출소후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했던 혹독한 노동을 통해 겨우 마련한 것이었다. 남한에 일가친척이 있었지만 뒷탈을 염려해서인지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 때 인텔리였고 한 나라의 검사로 재직했던 인물이 지금은 하루 세끼 식사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젊은시절부터 부침을 거듭하며 파란의 세월을 보낸 그의 70여년 인생 곳곳에 한반도 분단의 아픔과 고통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아 보는 이의 마 음을 안타깝게 했다.

신일용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6-26 오후 12:05
ⓒ 한국대학신문(http://unn.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목록
프린트 스크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1

최신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