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학문에 있어서 그 무슨 절대적인 증표가 되는 양 그 학위로 지적유희를 일삼고 있는 사람들의 행태가 더 문제가 된다. 물론 열심히 읽고 생각하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박사학위 소지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숫자에 있어서 그리 많지 않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모름지기 중국 조나라에 기창이라는 사람의 자세를 음미해보아야 할 성 싶다. 기창은 그 시대 활의 명인이었다. 천하제일의 명인이 되기 위해 그는 온갖 노력을 다했다. 마침내 명인이 되었다.
그런데 명인이 된 그 후부터, 그는 아예 활을 잡지 않았다. 그가 잊은 것은 활쏘기가 아니라 명궁에 대한 사소한 집착을 끊었던 것이다. 명궁이라는 명예를 극복하기 위해 활을 잊었다. 그것은 것은 활쏘기라는 기술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명인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겠다는 것이었다. 명궁이라는 오만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잘남부터 먼저 극복해야만 했다. 그제야 활쏘기는 그에게 하나의 선(禪)처럼 다가왔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의식의 마디마디는 그 모든 곳을 집중했다.
모든 것이 과녁이었고 모든 것이 배움의 시작이었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배움의 열정을 내면화시킨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박사라는 학위는 한 분야의 전문가인 동시에 그 분야에서 요구되는 첨단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명예이다. 모든 것을 다 배웠다든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을 인증해주는 그런 보증수표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더 많이 더, 새롭게 읽어내는 일을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가 박사학위이다. 그래서 박사는 모름지기 읽는 사람이어야 하며, 치열하게 읽는 사람이이며, 열정적으로 사고해야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하나의 지식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열심히 글쓰기에 임해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그들에게서 그런 배움에의 열정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요즘 대학가의 행태이다. 학생들보고 공부 못한다고 나무라고 꾸짖을 일이 아닐 성 싶다.
이점은 그들의 독서행태를 보면 더욱더 분명해 진다. 자기전공분야의 독서 한두권 정도를 읽는 일 이외에는 거의 독서가 없는 형편이다. 교수 스스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배우라는 말이며 읽으라는 말인데, 실제로 가장 읽지 않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고, 가장 새로운 배움에 게으른 사람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그저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그들 모두가 모든 것을 다 아는 채, 배움을 포기하고 있으며 독서를 끊고 있는 것이다. 독서와 마음의 관계는 마치 몸과 운동의 관계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박사학위자라는 전문가들이 글 읽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학문에서 마음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새로운 학문의 가능성은 불가능하다.
어느 작은 책모임에서 박사, 교수에게 간단한 질문이 날라들었다. 펄펄 끓는 가마솥에 쌀 한두 톨을 집어넣으면 무엇이 되겠는가라는 화두였다.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 질문은 바로 박사들의 지적게으름을 질타하는 순간이었다.
일년에 고작해서 평균 100쪽 미만의 글이나 읽는 교수들이 그게 어디 박사가 할 짓이라는 질문이었다. 죽도 밥도 아닌 이 땅위의 박사들을 위해 괴테는 이미 오랜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책을 읽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8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지만, 아직까지도 잘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신들은...”
모름지기 박사학위 소지자라고 한다면, 배움에 대한 괴테의 그 양심선언을 학문하는 이정표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