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를 보한재(保閒齋), 희현당(希賢堂)이라 한 신숙주(1417-1475)는 1439년 문과(文科)에 3등으로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의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그는 젊은 날에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열심히 읽고 동료들 대신 숙직을 하면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하기가 일수였다.
세종은 그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어의(御衣)를 하사하며 칭찬했다. 그는 세종으로부터 더욱 극진한 총애를 받아 일본 대마도와의 무역협정인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는 등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맡아 성실히 수행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는 그의 공이 가장 컸는데, 요동(遼東)에 귀양온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을 찾아 13번이나 요동으로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한 것으로도 알수 있다. 세조가 즉위하기 전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간 일이 있는데 이 때 그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따라 갔었다.
뒷날 세조와 각별한 처지가 된 개인적 친분은 이 때 맺어진 것이다. 과연 세조가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을 때는 의리를 저버리고 이에 가담했으며,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성삼문(成三問)과도 멀어지게 되었고 성삼문이 단종을 도로 임금으로 모시려다 실패하여 모진 고문을 당하는 마당에서 모욕도 당하였다.
의리와 지조를 목숨같이 여기던 조선조 사회에서 이러한 보한재의 변절은 용납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변절이 여름철에 가장 잘 쉬는 나물인 녹두나물과 그 성질이 같다고 하여 숙주나물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와는 다른 이야기로 세조에게서 극진한 총애를 받은 그가 평소에 녹두나물을 즐겨하여 밥상에 이 나물 반찬이 끊일 때가 없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조가 앞으로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부르라고 명령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玉蘇山人. 1940.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