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모든 정부정책의 포커스에 놓여지던 단계에서는 과학기술도 경제성장의 한 도구로만 인식되었다. 하지만 사실 과학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인류문화의 일부분이다. 과학은 자연에 대한 ‘앎의 방식’이고, 기술은 문화를 만들어온 ‘삶의 방식’이다. 이제 과학기술을 성장의 도구가 아니라 문화의 일부로 이해해야 하고 과학기술과 사회문화의 연계를 통해 삶의 질을 도모해야한다는 관점이 일반화되고 있다.
반세기전 영국의 스노우 경은 역사적인 캠브리지 리드 강연(1964년)에서 ‘Two Cultures(두 문화)’의 괴리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런 우려는 산업화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며 우리나라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간격을 줄이고 연계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국가경쟁력의 핵심이다. 지난 4월 과학기술부와 문화관광부가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의 융합·발전을 위해 공동노력하기로 하고 합의서를 체결했던 것은 시의 적절한 것이었다.
인문사회학계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하고, 과학기술계는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한다. 둘 다 옳다. 과학기술과 문화가 만나 대화하고 융합되는 과학문화에서 21세기 국가발전의 전략적 패러다임을 도출해야 한다. 한 나라의 과학기술은 과학교육으로 태어나, 연구개발을 통해 성장하며, 과학문화를 통해 완성된다.
과학기술, 성장 도구 아닌 문화의 일부로 이해해야
과학문화확산이라는 전략과제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형성돼있다. 문제는 과학문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산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실천과제다.
과학혁명으로 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하던 시절, 과학은 너무나 어렵고 전문적인 것이라 대중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계몽사상처럼 과학을 쉽게 대중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과학이 고도로 분화되고 복잡해진 지금, 과학을 대중화시킨다는 것은 어렵다. ‘과학이 쉽고 재미있다’는 생각은 오히려 과학을 천박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과학자들도 과학의 모든 분야를 이해할 수 없을진대, 일반대중들이 과학을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현실적 문제인식에서 나온 새로운 패러다임이 ‘연구의 대중 이해(PUR: Public Understanding of Resaerch)’이다. 게놈프로젝트, 줄기세포연구, 나노사이언스 등 어렵고 복잡한 대형과학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대중들은 정작 그것이 무슨 연구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때 대중의 이해나 관심에 맞게 특정연구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PUR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인간게놈프로젝트같은 대형연구의 경우 연구비의 일정비율을 반드시 PUR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과학연구홍보를 과학의 사회적 책임이자 의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일수록 과학자들의 과학문화활동이 더 두드러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과학은 사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존재한다. 말콤 맥킨토시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사회 속의 과학과 과학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과학자가 자신들의 통찰력과 발견을 공동체와 나눔으로써 우리가 우리 미래를 위해 집단적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