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 홈 > 뉴스 > 대학행정

목록
프린트 스크랩
[소설가 박완서] "이념은 그냥 하나의 문화일 뿐"
남북 극한대립, 정치인들의 빗나간 권력유지욕에서 기인
문단 언어해체 경향 '못마땅'…맛깔난 우리말 다음어 볼 것
잠재된 레드콤플렉스 창작의 발목
“이념은 색깔과 모양이 다른 다양한 문화중 하나일 뿐 서로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분단역사는 남북의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부실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침략자로서의 적의 위협이 있다는 논리를 이용해 온 거죠. 국민들에게 밥 잘 먹여 주고 안전보장 해주면 그만이지 이념은 별게 아닙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 겪은 6·25로 인해 가족을 잃은 아픔을 안고 살아온 소설가 박완서. 나이 마흔에 데뷔, 30년 넘게 현장을 지키며 분단의 비극을 ‘박완서 문학’의 큰 탑으로 승화시킨 박 작가를 김우종 주필이 만나 대담을 나눴다.

김우종 : 지구 저쪽편에 중동이라는 화약고가 있다면 동양의 화약고는 우리의 한반도입니다. 강대국은 한반도에 언제라도 성냥불만 그어대면 폭발할 장치를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남북의 대치구도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북한의 핵개발 문제로 들끓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박 선생처럼 분단의 비극적 현장의 한 가운데 서서 이를 겪고 한평생 이것을 문학의 핵심 과제로 삼아 오신 분의 소중한 한 말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박 선생은 고향도 38선 근처였지요?

박완서 : 저는 고향이 38선 바로 밑이던 개성입니다. 어려서부터 상경해서 학교를 다녔지만 고향집이 개성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내려갔었지요. 19세 때까지는 그곳에 갔었는데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제가 대학 1학년 신입생일 때지요. 그 후 대학은 다니지도 못하고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김우종 : 박 선생은 칠순이 된 지금도 현역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 속에 누구보다도 많이 우리의 분단 상황이 빚어 낸 문제를 소재로 삼아오신 것을 보면 박 선생이 대학생으로서 겪었을 6․25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 것 같습니다. 아픔은 크셨겠지만 그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소중한 ‘박완서 문학’을 낳게 했으리라는 뜻에서 말입니다. 그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박완서 : 무서운 일들은 9·28 수복 때부터입니다. 저는 인민군들이 서울에 들어왔다가 물러가 버리던 9·28 수복 때 정말 터질 듯이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반갑게 맞이한 우리 정부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말을 녹음테이프로 남겨 놓고 시민들을 서울에 그대로 남아 있도록 안심시키며 미리 도망쳐 갔던 정부는 서울로 되돌아 오자마자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에 대한 무서운 감찰활동을 시작했지요.

저의 숙부님도 그때 누군가의 밀고로 체포되고 형무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 분은 서울에서 아버지 대신으로 저의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서울에 들어온 인민군들은 숙부님네 마당에 말을 매놓기도 하며 숙부님께 밥을 해달라고 해서 그런 심부름도 했었어요. 그 집은 돈암동 한 길가의 큰 상점으로 우연히 그 사람들이 들어온 것이지요. 그리고 오빠는 보도연맹에 가입해 있었기 때문에 역시 그 무렵에 비명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경찰이나 군인보다 청년단이 더 무섭더군요. 정말 무서운 공포속에서 아버님이나 다름없던 숙부님을 잃고 오빠를 잃었습니다. 수복이 되었으니 대학에 다시 나가려 했지만 대학에서도 서울에 남아있던 학생들에 대한 신원 조사와 감찰은 마찬가지였습니다.

9·28 수복 직후에 일어났던 그런 일들은 대개 밀고로 시작되고 있었어요. 이웃도 친척도 누구도 믿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이웃, 가까운 친척 등 오래전부터 서로 정을 주고받던 우리사회의 전통적인 집단이 뿔뿔이 붕괴되고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김우종 : 독일 같은 분단국가와 달리 우리의 그 같은 이념적 양극화 현상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나는 6·25가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전쟁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강대국이라는 타의에 의해서 일으켜진 전쟁이지 우리가 우리의 자의적 자발적 의지로 일으킨 전쟁은 아니라고 봅니다. 해방 3~4일전 미국의 국무성과 육군성 해군성 고위 간부가 모인 심야회의에서 38선이 그어질 때부터 이미 그것은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기폭장치였고 그것이 계획대로 촉진된 것이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외세가 막강한 힘으로 작용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극한적 대립속에서 우리끼리 그렇게 미워하고 피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완서 : 저는 그것을 정치권력이라는 정치가들의 욕망 때문이라고 봐요. 권력이라는 것을, 아주 부실한 권력을 계속 거머쥐고 유지해 나가려면 어떤 강한 적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김우종 : 그것은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그런 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무서운 적이 있다고 믿게 해줄 수 있는 적을 말하겠지요. 강한 적이 있다면 더 중무장을 해야 되고 더 정신적으로 긴장해야 되고 어떤 불순한 비판적 세력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합의가 가능해지고 따라서 정치권력은 더욱 견고해 질 수 있으니까.

박완서 : 예. 부실한 권력 유지에는 그렇게 적이 필요하니까 없으면 적을 만들어야죠. 극한적으로 반공사상을 외칠 때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쪽도 우리처럼 그런 적이 필요하다. 그래서 밤에 서로 전화 걸면서 서로 잘해 보자고 한다는 말까지도….(웃음) 그러니까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이런 극단적인 대립, 이념과 갈등의 양극화가 발생했다면 우리들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는 것 같아요.

김우종 : 그렇게 부실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한 적이 필요하다면, 이념의 대립과 갈등도 그 같은 정치가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수단인 셈이군요. 남이나 북이나 한 민족인데 서로 자기 권력유지를 위해서 적의 존재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강대국이 우리를 쪼개놓지 않더라도 원천적으로 서로 쪼개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박완서 : 아니 그보다는요, 우리의 분단역사는 남북이 다 같이 그처럼 자신들의 부실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항상 침략자로서의 적의 위협이 있다라는 논리를 이용해 온 것 같아요. 그래서 양극화 현상은 날이 갈수록 그 골이 심해져 갔고, 그래서 이렇게 쪼개진 두 개를 하나로 만들기는 너무 힘들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자리가 두 개 아닙니까. 이제는 누구도 어느 쪽도 그것을 양보하기는 힘들도록 너무 골이 깊어졌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끊임없이 통일을 외쳐 오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보다는 서로 우호적인 두 개의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가 국민의 의식도 깨고 이념은 하나의 문화로 인식되고 정치의식도 높아지고 현명한 지도자도 나오면 그때 가서 선거에 의해서 하나가 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대통령도 ‘우리 번갈아 하자’ 하며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러시아도 무너졌듯이 절대적인 이념은 없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입니다. 그냥 국가는 국민들 잘 먹이고 안전보장만 잘해 주면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념은 이제는 그냥 하나의 문화인 셈인데 우리만 아직 자유롭게 왕래도 못하니 지구상에 이런 곳은 하나밖에 없겠지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만 외치지 말고 중국처럼 비자 하나로 마음대로 방문만 해도 좋겠어요.

김우종 : 박 선생은 ‘이념은 하나의 문화’라고 말했습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언어가 다르고 입는 옷이 다르고 먹는 음식이 다르고 장례 절차가 다르고 그것이 모두 그들의 고유문화이며 그 문화는 서로 충돌해야 할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이라면 이념도 그런 문화의 개념에서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통일을 막고 우리를 그토록 무서운 민족적 갈등의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이 이념이었다면 그 이념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남북관계도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얘기겠군요. 그리고 그렇게 이념이란 것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중의 하나라면 남북이 지금처럼 서로 다른 이념의 정치체제로 남아 있더라도 평화적 공존이 가능하겠군요.

박완서 : 네. 그렇게 해서 일단 두 개의 국가로 공존한 후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며 성숙해진 후에 선거에 의한 통일된 하나의 국가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지요. 그동안에 북한을 돕더라도 몰래 돕지 말고 공개적으로 도와주는 거죠. 공장도 세워주고, 그곳 노동자들도 함께 참여하고, 또 관광도 자유롭게 하구요. 지금처럼 하는 것은 아무 재미도 없더라구요. 북쪽땅을 밟아 본다고 해서 저도 금강산에 가봤는데 아무 감동도 못 받았어요. 여행이라는 것은 단체로 가더라도 밤에는 밖에도 나가봐야 하는데, 그것도 못하고. 일정 코스에서 이탈을 할 수 있어야 관광도 제대로 되지 않아요? 자유롭게 왕래하면 북한에서 배울 것도 있을 것인데....

김우종 :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통일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이념에 대한 명쾌한 해석입니다. 박 선생의 이념론은 그동안에 정치가들이 선동적 수단으로 우리를 세뇌시키고 적대개념으로 부풀리고 왜곡시켜 온 것에 대한 반론이며 통일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을 해소하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 통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경제문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잘 살고 못 사는 빈부의 문제가 아니라 계층적 위화감을 비롯한 많은 갈등요소가 되지요. 통일의 날이 오기 전에 공개적인 방법으로 국민의 협의를 얻어가며 북한을 돕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꼭 필요한 수단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문화적 갈등의 해소이겠지요. 우리도 북한에서 배울 것이 있을 것 아니겠느냐는 것은 남북이 서로 만남으로써 서로 고쳐가며 동질성을 이룩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박 선생은 우리 민족의 오늘의 문제와 내일의 갈 길에 대해서 중요한 현실적 방안을 구상해 오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박 선생은 앞으로의 창작생활은 어떻겠습니까? 아직도 말하지 못한 것이 있고 남은 그것을 방해하는 무엇이 있을까요?

박완서 : 아직도 잠재의식 속에서 레드 콤플렉스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월드컵에 등장한 우리 응원단의 빨간 옷에 적힌 로고가 ‘빨갱이가 되자’ 아네요? 붉은 색은 정열의 상징이고 선동적인 빛깔이죠. 그리고 젊음의 빛깔이고. 그런데 나는 저래도 괜찮은가 하고 좀 놀라게 되고 그런 것이 가능한 세상을 만나면서 신선한 느낌도 들었어요. 그러니까 6·25 당시에 겁먹은 사람들이 밀짚모자에 달고 다니고 자전거에 달고 다니던 붉은 리본을 잊지 못하고 있어서 아직 레드 콤플렉스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김우종 : 앞으로 작품에서 다루어 보고 싶은 소재가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박완서 : 다루어 보고 싶은 작품 소재보다는 우리말, 우리글을 좀 다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우리말은 너무 천대받고 있어요. 요즘 문학은 말을 짓이기고 해체하는데 몰두하는 것 같아 저는 ‘소설의 위기’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젊은 작가의 소설 속 언어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거든요. 말에도 미적 감각이 있지 않습니까. 글에는 의미도 물론 있어야겠지만 저는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어요.

김우종 : 저도 동감합니다. 우리가 늘 새로운 세상의 패러다임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우리말은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이럴 때일수록 박 선생 같은 문학계의 원로가 우리말을 지키는 데 앞장서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간 살아오시면서 겪어 얻은 풍부한 경험들을 작품으로 남겨 젊은 사람들에게 그 시대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완서 : 풍부한 경험이라고 얘기하셨는데 저한테는 너무 가혹한 경험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6·25가 터지지 않았다면 대학을 졸업할 수도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가졌던 꿈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 저는 ‘박수근 선생’에 관한 얘기를 한번 써보고 싶어요. 그 분은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죽고 나서야 그 분 그림이 인정을 받기 시작해 지금은 국내에서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 그림이 됐잖아요. 그 분 삶의 역정을 한 번 다루어 보고 싶어요.

김우종 : 박 선생의 초기작 <나목>에서 보면 박수근은 그때 동화백화점에 자리잡은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연명하고 있었고 박 선생이 곁에서 도와주고 있었지요? 9·28 수복이 되자 복학하려고 동숭동캠퍼스 뒤의 학교 관사에 오셨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 박 선생은 대학을 다 마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행인 것 같아요. 학자로서의 길보다는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학벌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일류대를 나오지 못하면 취직하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박완서 : 저는 일류대가 있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이 목표로 삼아 열심히 공부 할 수 있는 학교가 있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일류대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특정지역 특정학교에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봐요. 옛날에는 서울대에 가난한 시골출신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요즘은 강남의 몇 개 학교에서 돈 많은 사람들이 많이 간다고 하잖아요. 이것이 해결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젊은 사람들이 큰 꿈을 품고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일류대, 일류회사에 들어가기 위한 ‘기술’만 갖추려 하지 말고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뜻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는 젊은이가 되려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 박완서는 누구인가

1931년 경기 개풍군 출생

1950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중퇴

1970년 ‘여성동아’에 <나목>으로 등단

1993년 유니세프 친선대사(현)

1994년 공연윤리위원회 윤리위원(현)

1995년 96년 문학의해 조직위원회 회원

1996년 토지문화재단 발기인(현)

1996년 제27회 동인문학상 본심심사위원

2000년 환경부 환경홍보사절(현)

상훈 : 한국문학 작가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인촌상(문학부문), 황순원문학상, 보관문화훈장 등 수상

작품 :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나목>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 다수

조양희 기자 (yanghee@unn.net) | 입력 : 02-11-09 오후 2:21
ⓒ 한국대학신문(http://unn.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목록
프린트 스크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1

최신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