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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피천득] "내일의 역사 짊어질 젊은세대 자랑스러워"
새해를 맞게 되면서 이나라 최고령의 은퇴한 대학교수께 문안 인사도 드리고 좋은 말씀도 들으려고 피천득 선생을 찾았다. 이 분은 해방 한달 반만인 1945년 10월1일에 경성대학이 최초로 임명한 교수이며 지금 94세가 된다. 연세로 보자면 맑은 정신으로 신문사의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속으로 해 봤다.

그리고 이런 말을 전하며 질문의 방향을 잡아 나가려 했다. ‘선생님 임오년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이 시간의 우리들의 마음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착잡하고 또 설레이기도 합니다. 새 역사의 장을 펼치기 위한 대통령 선거도 이번에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정치판은 늘 신물이 나도록 썩고 병들어서 우리를 실망시켰다지만 임오년의 마지막달이었던 12월에는 거의 날마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가며 우리 민족의 장하고 아름답고 힘차고 당당한 모습을 전해 주기도 했습니다.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죽은 두 소녀의 넋을 달래 주기 위하여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영하의 추운 날씨도 아랑곳 하지 않고 거리에서 촛불 시위를 벌인 것이죠.

거기에는 머리가 허연 노인에서부터 애 업은 아줌마와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도 나와 있었습니다. 서울의 시청앞과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의 여러 도시 많은 광장에 그렇게 모여들었고 미국의 뉴욕과 워싱톤과 LA의 교포들도 그렇게 모여서 두 소녀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얘기를 길게 설명 드리지는 못했다. 부담을 느끼실까봐 간단하게 질문했다.

김우종 : 선생님. 제가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뵙는 이 시간에도 저 광화문과 시청앞 넓은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구름 떼처럼 모여 들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먼저 선생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이 땅에서 거의 1백년을 살아오신 분이시고 누구보다 일찍부터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문학으로 존경을 받아 오신 분이신데 저런 광경을 평생에 몇 번이나 보셨습니까.

피천득 : 우리가 거리로 쏟아져 나간 역사적 사건은 내 평생에도 여러 차례 있었어요. 나는 열살 때 3·1운동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때도 그랬었고 4·19 때도 그랬었고 군사독재정권 때도 민주화 운동으로 여러 차례 젊은이들이 거리에 나가서 함성을 질렀었지요. 그리고 지난번 월드컵 때야 말로 대단한 물결이었어요. 그렇지만 요즈음 시청앞 광장의 촛불시위는 과거와는 다르더군요. 함성을 지르기도 하지만 아주 조용한 모임입니다. 그렇게 많이 모이면서도 질서가 있어요. 여학생들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다는데도 그 많은 군중들이 그렇게 조용한 것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일이지요.

김우종 : 네, 옳게 보셨습니다. 지금 이 찬바람 부는 영하의 날씨를 무릅쓰고 저렇게 모여들고 있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고의든 아니든 심미선 신효순 두 여중생의 죽음은 너무도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가해자에 대해서 무죄라 해 놓고 그들을 곧바로 미국으로 빼돌리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며 아무도 솔직한 사과 한마디 하지 않으며 (나중에야 마지못해 했지만)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우리 경찰의 제지를 받다가 피 흘리는 모습 등을 보며 어린 학생들까지도 분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많은 군중들이 모였으면서도 저토록 질서 정연하다니 기이한 일이 아닙니까.

피천득 : 우리 국민이 그만큼 성숙해진 것이지요.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특히 내일의 우리 역사를 짊어질 젊은 세대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김우종 : 그런데 저것을 보면서 반미시위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확실히 소파(SOFA)협정을 비롯한 미국의 정책과 이번 사건처리에 대해서 반미 감정이 솟은 것은 사실이지요. 그렇지만….

대담은 여기서 잠시 중단되었다. 화제가 너무 무겁게 나갔나 보다. 그리고 다음 말에는 동의해 주셨다. 같은 혈육끼리 같은 민족끼리 서로 아픔을 달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지켜 주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지켜 주고 고통을 덜어 주겠느냐는 것. 저 거리의 촛불시위는 우리민족을 우리 스스로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우리의 권리라는 나의 말에 동의해 주셨다. 그렇지만 이런 화제는 더 길게 진행되지 않았다. 선생의 건강을 위해서는 될 수 있으면 좀 더 가벼운 이야기가 좋은 것 같았다.

대학 사회의 최고 선배이며 문단의 최고령자이며 이제 거의 1백년을 살아오신 분과 새해를 맞아 우리의 현실에 대한 얘기도 좀 나누려면 톨스토이의 ‘부활’도 좋고 남정현의 ‘분지’도 좋고 신동엽의 분단현실을 말하는 시들도 좋고 이 시기에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아주 재미있는 소재들은 참으로 많다. 두 소녀가 비명에 간 사건의 재판은 배심원제로 진행되었다. 그것이 우리의 재판제도와 다르다. 그렇지만 그런 차이 때문에 그것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는 것을 톨스토이의 소설 얘기로 풀어 나가면 아주 재미있을 것이다. 거기서도 카츄샤는 배심원의 평결로 유죄 판결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지로 떠나지만 그 배심원들은 각계각층에서 고루 고루 모여서 공정성을 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제정 러시아의 재판에서도 그랬었다.

남정현의 ‘분지’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당한 억울함 때문에 가해자인 미군의 아내에게 동일한 방법으로 성폭행을 가하고 도망친 인물의 얘기이므로 요즘 화두의 소재로는 아주 적격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 작가에게 5년 실형을 가하고 그 후에도 아무 설명도 없이 체포하고 고문하고 투옥해서 그의 일생을 망친 우리의 반공법에 대해서도 이번 기회에 같은 지식인이며 문인의 입장에서 말해 볼만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이번 대담에서는 생략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먼 옛날 일제시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김우종 : 요즘 세상에도 우리를 슬프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일이 많은데 일제시대에는 정말 더 화나고 답답한 일이 너무도 많았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시대를 어떻게 보냈습니까.

피천득 : 나는 일제시대를 젖은 짚단으로 살았습니다. 한번도 활활 뜨겁게 타올라보지 못하고 젖은 짚단처럼 연기만 내뿜으며 살았지요.

김우종 : 마른 짚단은 한번 불을 붙이면 뜨겁게 활활 타오르지만 곧 재가 되어 버리니 선생님이 그렇게 사셨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든든한 고목으로 살아남으시지 못했겠지요. 그렇지만 속만 태우며 가슴 속에서 연기만 뿜는 삶이 얼마나 견디기 힘드셨겠습니까. 식민지 시대를, 한일합방 직후의 어린 시절에는 어떻게 지내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피천득 : 나는 1910년에 태어났어요. 그해에 일제에 합방 당했지만 나는 그보다 조금 전에 태어났습니다. 대한제국의 국민으로 태어났지요. 독립국의 국민으로.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날 무렵에는 경성제1고보 부속 보통학교에 다녔는데 그때는 선생이 칼을 차고 다녔어요.

김우종 : 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헌병과 순사들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사무라이들한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일인데 선생들까지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피천득 : 어떤 선생이 칼을 들고 이런 말을 했어요. “이것은 연필을 깎기에는 너무 길지 않아요?”라고. 빈정댄 말이었지요. 그러다가 1년 지나서 칼은 사라졌어요. 문화정책으로.

김우종 : 그렇다면 3·1운동을 겪으면서 그들은 무력에 의한 강압적인 수단만으로서는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선생들의 칼도 회수해 갔군요. 그 후 얘기 좀 해 주십시오.

피천득 : 그 후 제1고보를 마치고 나는 금강산의 장안사 근처로 절을 찾아 갔습니다. 거기서 한동안 지냈지만 거기서도 실망하고 다시 속세로 나왔어요. 그곳에서는 김일엽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상해의 호강대학에 가서 영문학을 공부했지요. 이광수의 권유로 갔습니다. 그 사람이 상해에 있었지 않아요. 임시 정부의 도산 안창호 곁에 있었지요. 거기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아무데도 취직이 안 되어요. 선생으로 받아 주지 않아요.

김우종 :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에서 돌아왔다면 그렇게 간섭받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피천득 : 그래서 학원 선생만 하다가 잠시 도서관의 임시 고용원이 되고 해방이 되자 오천석의 추천으로 10월1일에 경성대학 예과 교수로 임명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제자를 남긴 것. 이것이 내게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어요. 지금도 제자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나를 데리고 나가서 식사도 함께 해주고.

김우종 : 좋은 제자들은 많이 인연을 맺으셨지만 선생님께서 꼭 맺고 싶었어도 그냥 미수에 그친 인연의 여인이 있지 않습니까. 수필 ‘인연’에 나오는 아사꼬 말입니다. 국민학교 아이인 그 여인을 선생님은 17~8세 때쯤에 처음 만나고 다음에는 대학생이 된 성숙한 여인으로 아사꼬를 만나고 다음에는 해방후 결혼한 여인으로서 아사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성숙한 대학생이 되었을 때 왜 서로 좋아하면서도 확실한 인연을 맺지 않았습니까.

피천득 : 그 때는 우리가 해방되기 전이니까. 아사꼬는 일본 여자이니까.

김우종 : ‘우리가 10년만 일찍 해방되고 독립 했었더라면’, ‘그때 그 사람을 만났었더라면’ 이라는 비슷한 말을 그 수필에서 하셨는데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사랑은 국경을 초월할 수도 있다고 흔히 말하는데 그 때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셨군요. 문학에서는 어떻습니까.

피천득: 우리 문학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민족주의 입니다.

김우종 : 긴시간 무리한 질문도 드리며 너무 피곤하게 해 드렸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피천득은 누구

1910 서울 출생

1932 신동아에 ‘서정별곡’, ‘파이프’ 등을 발표

1940 중국 후장대 영문과 졸업

1945 경성대 예과 부교수

1946~1974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 교수

1963~1968 서울대 대학원 영문과 주임교수

1975~ 서울대 명예교수(현)

* 상훈 :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제9회 인촌상(문학부문), 제9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 작품 : ‘인연’, ‘서정시집’, ‘산호와 진주’, ‘금아시문선’, ‘생명’, ‘삶의 노래’ 등 다수

한국대학신문 | 입력 : 02-12-23 오후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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