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 백서 발간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사실에 입각하고 공정해야 할 백서가 오히려 언론보도에 대한 왜곡과 과장 해석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설혹 다소간의 오보가 있더라도 이는 취재 환경의 제약에서 초래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 때문임으로 국가권력이 이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언론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논리도 펼쳤다.
새로운 취재시스템 도입 등으로 새 정부와의 달콤한 허니문도 즐길 틈이 없었던 언론사 입장에서 오보 백서의 발간을 권력의 언론 길들이기로 의심하는데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누가 옳은지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이 사안에 사설과 입맛에 맞는 전문가까지 동원해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 과연 언론의 정도인지를 따질 의향도 없다. 다만 오보 백서까지 나오게 된 오늘의 언론환경과 언론의 일차적 기능인 사실 보도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대하는 우리나라 언론인들의 ‘당당한’ 자세가 자못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며칠 전 미국의
사실 조작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지미의 세계’다. 1980년대 <워싱턴포스트>의 한 기자는 지미란 인물을 통해 마약의 위험성을 실감나게 보도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지미가 허위 인물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수상이 취소되었다. 제2의 지미의 세계도 있었다.
1998년 6월 <보스턴글로브>의 칼럼니스트는 가공인물에 대한 인터뷰를 토대로 보스턴시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당사자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났다.
시간을 다투는 기자들에게 오보의 가능성은 상존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바라는 효과를 창출하거나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인용한 것처럼 기사를 작성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에 대한 언론인들의 태도다. 행여 억울한 부분이 있더라도 잘못을 떳떳하게 인정하고 필요하다면 모든 책임을 짊어지는 자세와 세상과 여건을 탓하며 독자의 알권리를 빌미로 언론자유 침해를 부르짖는 행태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바람직한 언론인의 태도일까.
1994년 남아공 출신의 카터 기자는 사진기획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기아에 허덕이다 쓰러진 수단의 어린 소녀와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살찐 독수리를 한 컷의 사진에 담아 가뭄과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했다는 이유에서다.
상이 수여되자 일부에서 사진촬영에 앞서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카터는 가족 앞으로 편지를 남긴 채 33살의 나이로 자살했다. 직업윤리에 위배되는 어떠한 행위도 없었지만 일각에서의 시샘 어린 비난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젊은 기자의 선택이었다. 우리 언론인들은 이 기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