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들은 교수의 연구업적의 평가지표로 학술논문의 게재 편수를 삼는다. 그래서 당연히 교수의 논문을 게재해 주는 학술지의 질이 어느 수준인지도 함께 평가한다. 이런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 조정해주는 곳이 대학의 교무처나 연구처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상당히 체계적이고, 전문적이어야 한다. 학술적으로도 그 무슨 권위 같은 것이 그런 곳에는 있어 주어야 한다. 동료 교수들의 승급, 승진을 다루는 일이니 그 누구도 적당히 얼버무릴 수는 없다.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총장은 그런 곳의 보직교수들 일 록 교수업적 평가에 식견이 충분한 사람들로 임용한다. 그래야 총장의 대학 운영 역량도 함께 돋보이기 마련이다. 전문성을 인정받은 그들 보직자들이 내리는 결정에 일반 평교수들이 반론을 제기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마침내 대학의 한 과에서 일이 벌어졌다. 서너달 전에 학과에게 학술지 등급을 정해 올리라는 본부의 요청이 있었다. 각 과는 정해진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교수들에게 해당전공 학술지의 성격과 등급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그 결과를 기초로 해당학과는 본부에 해당 학과가 결정한 1등급 학술지 명단을 보냈다. 교수들의 의견이 존중되는 것으로 알고 모든 교수는 자기의 승급 승진을 위해 해당 학술지에 투고도 했다. 그런 도중 승진용 학술자료를 준비하던 어느 신임교수는 어안이 벙벙해지기 시작했다. 그 교수 전공의 학술지는 단 하나도 1등급 학술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교무처의 인터넷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해당 학과가 본부에 제출한 학술지 등급 명단에는 자기의 학술논문이 게재된 학술지가 분명히 1등급이었다. 그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그 교수는 경위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해당 부서의 답은 명확했다. 행정 보직자의 변동과정 중에서 불거진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교수가 속한 과에서 제출한 1등급 학술지 수는 비슷한 교수 수의 다른 학과에 비해 너무 많다는 판단이었다. 본부의 입장으로서는 학과간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자기가 속한 학과도 그 교수의 학과와 비슷한 수의 교수를 갖고 있는데, 그 과에서는 해당전공 일등급 학술지를 4개로 한정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다른 학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도 해주었단다. 물론 학술지 등급선정의 기준으로 교육부의 지침을 따른 것이라는 해명도 곁들였다고 했다. 사정이 그렇기는 하지만, 승진 심사과정에는 유보사항을 두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도 토 다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핀잔 겸 야유가 적절하게 배합된 위로의 말을 듣게 된 그 교수는 신참교수이었다.
승진 대상 교수이었기에 아무소리도 못한 채 교무처 관계자의 방을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자기의 승급이나 승진을 다루는 일에 초임교수가 사사로이 가타부타 논했다가는 오히려 괘씸죄에 걸리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마저 들었다. 이 얘기를 여러 교수들이 함께 전해 들었다. 자기전공 영역의 학술지들이 제출된 그대로 A등급지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정말로 다행이다라는 식의 안도감이 섬광처럼 반짝거렸다. 참으로 곤욕스러운 순간이었다. 해당 전공에서 1등급 학술지를 단 한권도 인정받지 못한 어느 고참교수도 격정의 감정을 갖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당 학문분야에서 지금까지 그 누구 못지않게 수백편의 글과 수십편의 저술을 한 그의 학문적 권위가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부조리에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번뜩이는 일순간의 생존 아이디어도 떠 올랐다.
앞으로 승급을 하려면 다른 전공을 연구해서 본부가 인정하는 학술지에 자기의 학술 논문을 게재하면 그럭저럭 정년까지 생존할 수는 있을성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 고참교수는 학과 교수들 간의 화음을 택했다. 그는 앞으로 학과의 일에는 그저 침묵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