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김희영 옮김). 이 책은, 나에게는 두 번째 바르트 읽기였던 셈이다. 그 첫 번째가 <카메라 루시다>(조광희 옮김). 나는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편했다. 솔직히 <카메라 루시다>, 그 문장의 호흡, 쉬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반면, <사랑의 단상>은 편하게, 놀면서 읽은 셈이다.
<카메라 루시다>는 <예술의 성>(김화영), <드가․춤․데생>(발레리, 김현 옮김), <꿈꿀 권리>(바슐라르, 이가림 옮김) 등으로 이어지는, 모처럼 작심한 ‘미문 읽기 작업’의 연장이었다. 산문이 주는 아름다움이라니! 그것을 몸소 깨닫게 만들어 주는 몇 권의 책. 게다가 이 네 권의 책은 죄다 미술 관련 전문 출판사 열화당에서 펴낸 것들. 나는, 이 책들 때문에 이 출판사마저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나에겐, <카메라 루시다>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진땀이 나게 만드는 책! 그러나 좋은 느낌의 책! 한번은 헌책방에서 이 책이 다시 눈에 보이기에 덥석 집어 들었더니, 옆에 있는 어떤 이가 말을 건넨다. “좋은 책 고르셨네요” 젊어 보이는데, 학생 같은데, 이 책을 편하게 읽어냈나 싶었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그 젊은이, 옆에 있던, 일행인 듯한, 더 어려 보이는 이에게 “너에게 권하려고 했던 책이야, 저 책. 신입생들이 읽기에 좋은 책이지.”
나는 속으로 감탄사를 토했다. 요즘 학생들, 대학 신입생 시절, 이런 책을 읽는구나! 바르트의 책을 읽는 신입생이라니, 바르트의 것을 후배에게 의젓하게 권하는 선배라니. 아무튼 <카메라 루시다>, ‘사진에 관한 노트’라는 부제에도 불구하고 전혀 사진에 관한 글로는 읽히지 않았던, 신비로운, 그 얇은, 책 한 권 앞에서 헉헉거리고 있던 당시의 나에겐 충격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고종석이 좋아하는 표현대로라면, 불란서, 그 쪽 책들은 죄다 부담스럽다. 일단, 읽기가 만만하지가 않다. 내가, 그나마 번역서 몇 권을 읽고 좋아할 수 있는 까닭은 전적으로 옮긴이들의 노고 덕분이다.
조광희, 김현, 이가림 등 몇 분은 바르트나 발레리, 바슐라르 보다 더 아름다운 문장을 평소 구사하는 분들임에 틀림이 없다. 일단, 그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꼬부랑글자’를 앞에 두고 내가 탄복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내가 감탄한 것은 바르트나 발레리, 바슐라르의 것이 아니라 조광희, 김현, 이가림의 한국어 문장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모두에게, 당신이 생각하기에 글 잘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꼽겠느냐 묻는다면 그 답이 어떨까. 물론 대답은 제각각일 수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이름이 분명 있을 것 같다. 내가 염두에 둔 이름. 한국어 문장을 가장 정확하게, 찰지게, 아름답게 구사하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고종석이다.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이명원이 그랬단다. 고종석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을 읽으면서 자신은 이제껏 단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그리 글을 잘 쓴다는 고종석은 논술시험을 앞둔 자신의 아이에게 누구의 책을 권할까. 고종석이 꼽은 사람은 둘이다. 한 사람은 아직도 현역에서 작가로 활동 중이고 또 한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복거일과 정운영이 그 주인공들이다.
1990년 벽두에 선보인 복거일의 <현실과 지향>은 시대와 무관하게 읽어야할 책. 자신의 입장을 어떠한 논리로 그 골격을 세우고 살을 붙여나가는지, 그리고 상대의 논리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설득하는지에 착목해야 한다. 복거일의 주장에 동조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역시 같은 시기에 출간된 정운영의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경제학을 위한 변명> 같은 책 또한 마찬가지. 정운영은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읽는 이를 간단히 압도해 버린다. 산문 문장의 화사함까지도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평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의 첫 번째 요건은 정확한 문장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소개한 책이나 인물들은 이러한 원칙을 고집스레 지킨다.
언젠가 강유원이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소리내 읽어 보라. 읽는 사람 등에서 절로 식은땀이 흐르게 만드는 구절. 더불어 경계하자.
“과학자나 공학자들은 아무 숫자나 쓰지 않는다. 0.01의 계산 착오가 우주선을 빗나가게 하며 열차를 탈선시키며 기계의 오작동을 불러오며 이것이 결국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 숫자나 써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들은 형사적 처벌을 받는다. 그러면 글 써서 먹고산다는 사람들은?”
이승호 객원기자 news@un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