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년 동안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첨단과학과 기술의 확산을 가져왔다. 선진국가들과의 지식격차가 컸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서 한국대학의 역할은 해외에서 축적된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었고, 정부의 역할은 교육받은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대학졸업생들은 그러한 지식을 이용해 국가를 초고속으로 발전시켰다. 자본과 자원이 모두 부족한 나라에서 지난 40년 동안 연 8%의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는 한국이 지식전수와 교육받은 인력을 길러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대학의 수준은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의 수준은 점차 하락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많은 대학들이 생겨났지만, 학문적인 수준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부는 급증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학의 숫자를 늘려왔지만, 가장 중요한 교육의 질은 향상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의 대학들은 외형상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학문적 탁월성에는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이제는 교육부문에서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한 구조조정이 시행되어야 한다. 한국에서의 대학 구조조정은 능력있는 대학만이 국가교육 기관으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능력있는 대학이 곧 능력 있는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대학의 부실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첫째, 한국의 대학들은 그동안 산업에서처럼 다른 대학을 모방하는 소위 '나도주의(me too)'에 빠져, 교육의 질과는 관계없는 양적 팽창에 전념해 왔다. 다시 말해, 다른 대학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해야 손해를 안 본다는 잘못된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왔다.
둘째, 대학도 경제처럼 규모의 경제, 좀 더 넓게는 범위의 경제에 의존하고 있다. 규모의 경제는 규모가 커지면 기업에서 단위 당 생산비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대학은 그러한 논리에 의하여, '대학을 키우고 학생수가 많아지면 원가절감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학원생들의 수는 20년 전과 비교해 두 배에서 네 배까지 증가했고, 교육은 '너무 커져서 좋은 제품이 나오기 힘든 산업'이 되어 버렸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모두 합하면 전 인구의 4.07%에 이르는데, 이는 세계 최고의 규모이다.
셋째, 한국의 인구가 4천7백만인데, 그 중 매해 1십만명 이상의 학생들이 한국의 주요 3대 대학이자 소위 SKY 대학이라 불리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 등록한다. 이는 곧 학연 사회인 한국에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들만으로 사회 요직의 상당 부분이 채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소위 SKY 대학 출신이 아닌 이들의 눈에는 3개 대학 출신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으로 보인다. 권력과 영향력의 불균형은 궁극적으로 한국사회를 다원화와 통합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나는 대학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고 국가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한국 대학들은 효과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다양화와 사회통합 뿐 아니라 우수한 교수 요원과 행정 요원들의 확보, 장기적 사회발전을 위한 국가 교육정책의 조정, 학문적 수준 제고를 위한 대학 규모의 축소 등을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대학이 교육과 연구의 질을 제고시킬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곧 대학이 지식을 산출하고, 고급인력을 갖추어서 지식기반사회의 수요에 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수준의 학문연구와 교육이 제도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교육에 대한 혁신적 노력과 재정적 지원이 계속되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는 대학이 그러한 혁신을 스스로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은 사회의 끊임없는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도움 없이는 대학 혁신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또 지식창출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는 새롭게 연구를 시작하는 학문 후속세대나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기존 연구자 모두를 위한 지원체제를 수립해야만 한다. 새로운 지식창출을 위해서는 연구기간 동안 내내 지속되는 지원체제가 필요하다.
특히 이와 같은 연구지원 체제는 기초학문 분야에서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기초학문의 지원이 시행되지 않으면, '빈칸 밖에서 사고'하는 능력의 습득이나 새로운 지식의 창출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대학은 또 교육부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으로 발전해 나갈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더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나가려는 인력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최근 정부가 대학의 자율성을 다소간 인정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대학의 유연성과 능력을 제한하는 부차적인 규정들이 존재하고 있다. 교육과 연구와 행정에 자율을 허용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구사항이다.
나는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한 후, 서울대학교가 이런 변화들을 담보하고 세계수준의 대학으로 발돋움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왔다. 서울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동료교수들과 더불어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회 발전과 대학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동안 서울대는 국가에 크게 공헌하는 뛰어난 졸업생들을 배출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대학들처럼 서울대도 한국사회의 도전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혁신적이고 유연하며, 효율적이고 적극적이 되어야만 한다.
대학은 과거의 업적이나 낡은 교수법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수와 직원들은 모두 미래 한국사회 형성을 위해 최상의 학문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명백한 운명이자 도덕적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