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경향신문 경제부장, 편집국장, 주필
문화일보 주필, 전무이사 / 문화일보 대표이사 사장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
현재) 상지컨경영설팅(주) 회장,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고문
* 주요 저서
- 한국의 경제관료(공저), 1979 / 거탑의 내막(공저), 1983 / 한국의 이너서클, 2002
자, 이 1단짜리 기사만 보면 사실은 분명해 진다. 김 피고가 뇌물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그에따라 형을 언도받은 것이다. 그럼 이 사실은 진실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실은 전혀 엉뚱한데 있다는 것이 피고측의 주장이다. 국제 변호사인 딸은 방대한 사건 자료를 연구하며 아버지의 결백을 위해 6개월 동안 싸웠다고 한다. 그 동안 피고는 자신의 결백만을 믿고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부정과 부패와 싸우는 검찰은 온갖 증거를 들이대며 그의 유죄를 주장해 왔다. 6개월 동안 증거가 보강되고 새로운 증인을 내 세웠다. 그러나 법의 심판은 공정한 것이어서 피고는 혐의를 벗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왜 집행유예의 판결을 받았는가. 당초 검찰은 피고가 모종의 사업 이권을 댓가로 8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두었다.
그러나 거의 그 혐의가 무고임이 밝혀지자 이와는 별도로 돈을 받았다는 혐의를 급히 추가했다고 한다. 재판부는 이 추가 혐의 부문만을 유죄로 인정한 것이다. 피고측은 이 부분도 결코 결백하며 이런 결과가 나온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법조계라 할 수 있는 검찰과 변호사와 법원에 얽혀 있는 틀이다. 검사는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유죄추정의 목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피의자를 피고석에 세워야 유능한 검사다. 치밀한 수사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와 증인을 찾아내려 한다. 여기에서 무리가 따른다. 피고의 결백을 알면서도 밀고 나간다. 특히 사회적 표적이 되어 이미 공개된 사건은 더욱 그렇다. 검찰의 명예와 검사의 공명심과 장래가 그 사건의 귀결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 여론이 죄인으로 몰아가면 검찰조차도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국민정서와의 타협이라는 요소가 유죄를 촉진한다. 억울하다고 울어도 말이다. 당초 본안 사건은 혐의가 벗겨지고 추가 혐의로 김피고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바로 '법조 컨넥션'이라는 게 진실이라는 주장이다. 법원이 검찰의 체면을 위해 피고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설명이다. 결국 김아무개 피고는 돈 한 푼 받은 게 없는데 6개월 동안 조사받고 재판받고 그리고도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엄청난 낙차가 사실과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진실을 밝혀낸다는 판결 마져 또 다른 진실이 숨어있다. 법을 수단으로 한 권력집단 사이의 또 다른 생산양식이다. 적어도 피고쪽에 진실이 있다는 판단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문제의 추가 뇌물을 주었다고 검찰에 말한 증인이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다. 피고측은 그를 증언대에 세우려 했다. 그러나 변호사는 그걸 막았다. 추리는 이렇다. 가벼운 형량으로 의뢰인 보아주고 아무리 무죄라도 검찰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게 변호사 입장이다. 10년을 구형 했는데 판사가 무죄라고 방망이 치면 검사 일생 망치게 된다. '이해 관계의 조율'이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지금 무수한 '국민 재판관들'이 온갖 '재판'에 참여하고 있다. 한 가지 사실이 전해지면 엄청난 '핵분열'을 일으킨다. 비난과 모두 글렀다는 부정 심리가 '사회재판'을 지배하고 있다. 진실이라는 본질은 아우성 속에 매몰되고 있다. 텔레비젼속에서 가짜 진실 게임만을 보고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혼돈이다. 진짜 죽일놈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유죄판결'을 내린다. 어떤 직장 노동자가 연봉 5천만원 받는다고 하면 '5천만원이오'소리만 합창한다. 부동산 투기잡자고 하면 아예 강남사는 자들은 몽땅 피고가 된다. 내가 손해면 불법이고 남에게 이득이면 특혜다. 비판과 주장과 '판결'은 사회적 역동성의 요소가 될 수 있다. 단 진실을 알고 할 때 그렇다. '진실의 빈곤'이 여러 일들을 그르칠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