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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무엇인가
속박과 가치가 없는 자유는 가치가 없다
1. 자유의 반대말, 속박과 강제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기만 하고 답은 않으니 마음이 저절로 한가하네 問爾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이백(李白)의 시다. 그는 약 1천3백년전의 사람이다. '마음이 스스로 한가롭다'의 자한(自閑)은 자유의 극치라는 느낌이 든다.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라는 말도 역시 자유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성불(成佛), 돈오(頓悟), 일체지( 一切智) 등도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성불이라는 말의 '성(成)'이 나타내듯이 이런 자유는 개인이 몸소 성취하는 것이다.

이백은 ‘여산의 노래, 시어 여허주에게 바침 廬山謠 寄廬侍御虛舟’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스스로를 '초(楚)나라의 광인'이라면서 당시의 주류 세력에서 결별을 선언하고 있다. 그가 외면당하고 외면했던 주류 세력은 공자적인 유교다. '나는 본시 초 땅의 미친 놈, 공자 녀석을 미친 노래로 비웃고 있지 我本楚狂人 狂歌笑孔丘'. (공자를 아무 존칭의 첨가 없이 그의 이름인 구丘로만 부르고 있는데, 그래서 '공자 녀석'이라고 번역했음)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계속 된다. '오악의 신선을 찾아 먼 길을 마다 않고, 명산에 들어 가 놀기 일생 동안 좋아 했다 五岳尋仙不辭遠 一生好入名山遊' 여기서 오악의 신선을 찾았다는 것이나 명산에 들어 가 논다는 것은 자신이 유가에 대립하는 도가의 사람임을 나타낸다. 초 땅은 양자강 이남이다. 그리고 유가(儒家)와는 반대인 도가(道家)의 고장, 경사(經史)의 반대인 시문(詩文)의 고장이기도 하다. 초사(楚辭)를 쓴 굴원도 초(楚) 출신이다.

원래 남만(南蠻)은 중원 사람들이 양자강 이남의 땅과 종족에게 붙인 멸칭(蔑稱)이다. 양자강 이남을 강남(江南)이라고 부른다. 초는 곧 남만이고 이백은 남만 출신이다. (티베트 출신이라는 말도 있고 인도계 혈통이라는 설도 있다.)

중국이라는 말의 뜻은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라는 복수 명사다. 중원의 제후국들이 중국이다. 중원은 양자강 이북, 황하 이남의 땅이다. 이른 바 화하족(華夏族)이 지배 세력이었다. 그들은 유교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리고 이른 바 문화(文化), 왕화(王化)라는 말로 주변의 蠻狄夷戎을 중원의 문자와 정치제도로 동화시켜 나갔다. 문화는 한자를 사용하게 하는 것이고 왕화는 중국의 정치제도를 본 받거나, 중국으로 편입되는 것을 말했다. 공자로 대표되는 유교 이데올로기와 중원의 지배, 이백에게는 이것이 속박이었다.

'광인'이라는 것은 '자유인'이다. 거기에다 광인이라는 말 앞에 '초'라는 매김 말을 추가함으로써 구체적 대립 요소를 강화하고 있다. 공자를 비웃는다라는 말로 이 대립 요소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백에게는 공자가 속박이었던 것이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꼬집어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자유의 반대말과 자유를 함께 음미하면 좀 접근이 쉬워질 것 같다. 속박(束縛)과 강제(强制)가 자유의 반대말이다. 광인(狂人)과 공구(孔丘)를 함께 놓고 보자는 것이다. '타공구(打孔丘)'라고 하지 않고 '소공구(笑孔丘)'라고 한 것은 좀 김빠진다. 그러나 안심이 간다. 나는 이백과 공자를 둘 다 매우 좋아한다. 속박과 강제도 그렇지만 자유는 일차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속박은 자유가 그 밖을 넘어 나가지 못 하게 제한하는 틀이고 경계이다. 그 경계 안에서는 자유로울 수도 있다. 그것은 시간의 경계일 수도 있다. 장소, 허가, 약속의 경계일 수도 있다. 허가의 경계의 예로서 형법을 들 수 있다. 민법은 약속의 경계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이 유한한 모든 생물은 시간의 경계 속에서만 살아 있다. 그것을 넘으면 죽음이다. 축구, 야구, 테니스 등 경기는 운동장 눈금을 벗어 나서 경기 할 수 없다. 바둑은 바둑판 속에서만 진행된다. 생명체나 경기는 물론이고 우주의 모든 존재는 공간적 시간적 경계를 가지고 있다. 속박 속에 있는 것이다.

강제는 타자의 의지에 의하여 움직이도록 강요되는 상태 또는 자신의 움직임이 타자에 의하여 저지 되고 있는 상태다. 강제는 강제에 대한 불복종에 대해서는 처벌을 전제해 두고 있으며 처벌을 실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처벌은 점점 더 증강되는 고통으로 불복종에 대처한다. 이와 같이 강제는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력 행사를 전제로 한다. 강제는 속박의 심화라고도 볼 수 있다. 속박이 자유로운 행동에 대한 시간, 공간, 규칙에 의한 제약이라면 강제는 행동하는 사람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의 강요다.

속박 속에서도 어느 만큼의 자유는 허용되는(예컨대 감옥살이 하는 죄수의 휴식 시간 같은) 것이 보통이고 어떤 자유에도 속박은 있는 것이 인간 실존의 조건이다. 죄수 가운데는 석방을 기다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다. 탈옥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자유의 경계는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텔레비젼 만 보고 있으면서도 좁은 데가 아닌 넓은 데서 앉아 있기를 선호하는 것을 공간적 자유라고 부르면 어떨까. 사람에 따라서는 허용된 자유를 별로 활용하지 않으면서도 속박은 견디기 어려워 한다.

하늘은 높아 새를 날도록 하고

바다는 넓어 물고기를 뛰놀게 한다

위의 싯구는 속박이 없는 상태를 노래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새나 물고기는 정말로 자유로운가. 공기나 물의 저항, 더위나 추위, 먹이 사슬의 상위에 있는 더 강한 육식 동물의 존재 등 속박은 공간의 넓이가 주는 자유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한 편, 새는 공기의 저항이 있기 때문에 날 수 있다. 공기의 속박이 자유로운 비상의 매개체가 된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라는 말이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속박이나 강제가 없다면 자유는 인간에게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끝없는 하늘을 나르는 비행기나, 한 없이 펼쳐진 평원을 달리는 기차를 타고 앉았으면서도 객실에 갇힌 기분에서 오는 협소 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는 달리 아무리 좁은 공간에 틀어 박혀서라도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며 무언가를 그린다든지, 머리 속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속박의 좁은 경계 속에서도 실제로 자유를 행사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자유의 실제 행사를 운동적 자유라고 부르면 어떨까 한다. 속박이 위치적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라면 강제는 운동적 자유에 反하여 강제한다. 자유의 반대말인 부자유를 구성하는 것은 속박과 강제다.

한국대학신문 | 입력 : 03-11-06 오후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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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크 이런 이거 이거 고얀것 2004-03-11
2 경계인 이렇게 좋은글을 올리신 강위석님은 누구신가요?? 2003-11-07
1 경계인 이렇게 좋은글을 오리리신 강위석님은 누구신가요?? 200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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