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대학과 자유
1. 자유의 반대말, 속박과 강제
2. 욕망과 의지, 권력과 권리, 자유
3. 자신에 대한 권력과 타인에 대한 권력
4. 권력 집단, 자유인 집단
5. 자유주의와 반자유주의, 자유주의와 복잡계 이론
6. 경제적 자유주의: 사유재산과 시장교환
7. 한국에서 자유의 강, 한국은 자유의 나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
들어가는 말--대학과 자유(1)
대학은 다른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다른 교육기관과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면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양 쪽 다 성인(成人)들 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가르침과 배움 이상의 것이 개재된다. 다름 아니라 생각이 그것이다.
공자는 말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함이 없으면 허망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움이 없으면 위태하다(學而不思罔 思而不學殆)” 나이가 어느 수준 이하일 때는 어린 사람일수록 생각만 하고 배움이 없으면 더욱 위태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수준 이상이면 나이든 사람일수록 배우기만 하고 생각함이 없으면 더욱 허망할 것이다. 생각함이 없는 배움이 허망하다는 것은 그 배움이 아무 쓸 데 없다는 뜻이다.
생각은 배움을 개인의 것으로 내부(內部)화한다. 그리고 그 배움을 지혜와 지식으로 만든다. 배운다는 것을 음식물을 획득하여 창고에 저장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먹어 소화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먹은 음식이 없이 소화만 한다는 것은 확실히 위태롭다. 그리고 음식을 쌓아 두기만 하고 먹어 소화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허망하다.
배운다는 것은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다. 이 정보에 개인 자신의 생각함이 부가되면 그것은 지식이 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야 보배다”라는 말 그대로 이것저것 얻어들은 정보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에 자신의 생각을 부어 꿰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못 한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대학과 그 이상의 공부는 배움과 생각함을 스스로 늘이고 이 둘을 배합하는 노력이다-은 대체로 기술과 교양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기술은 어느 수준까지는 생각함을 덜 요구한다.
그러나 기술 분야라고 할지라도 배운 것을 보다 발전시킨다든지, 그것을 다른 기술 분야와 연결한다든지, 나아가서 기술을 교양, 즉 가치의 문제에 임베딩(embedding)하는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생각함의 뜨거운 고뇌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생각함 없는 배움은 어느 수준 이상의 지능에게는 배울 흥미를 주지 못 하기 때문에 배움 자체 마저 중단하게 한다.
교양학문은 흔히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이 분야의 공부야말로 기술 분야와는 달리 애초부터 생각함 없는 배움만으로는 전적으로 허망하다. 우리나라 대학 교육에서 인문학 위기를 걱정한지가 오래 되었다. 내 생각에 이 위기의 본질은 우리나라 대학에서의 인문학 공부가 생각함이 없는 배움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릇 공부라는 것은 변증법적인 순환을 갖는 나선형(螺旋形) 모양으로 진전하는 것인 듯 싶다. 한 순환의 처음은 배움으로 이루어지는 정(正), 둘째는 배운 것에 대한 개인의 의심과 비판으로 이루어지는 반(反), 셋째는 이 정과 반을 지양하는 종(綜)이다. 이런 순환을 계속하는 것이 공부이다. 공부에서 정은 수동적 배움의 단계이거니와 반과 종은 능동적인 생각함의 단계이다.
우리나라 인문학이 생각함을 배제하는 배움 위주가 된 것은 그 역사가 매우 길다. 문화적 선진국이요 정치적 대국인 중국의 학문을 교조적으로 ‘배우기’만 하는 패턴으로 화석화한 것은 이 부정적 역사의 가장 중요한 물줄기였다. 특히 조선조에 들어와 성리학을 유일사상으로 채택하고부터는 이 패턴은 더욱 경화(硬化)하였다.
70년대 이후 경제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학 공부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팽창하였다. 유교 공동체적 간섭주의를 밑바탕에 깐 남한 체제는 대학을 정부 권력 아래 철저히 묶었다. 정부가 교육을 감독하여야 모든 교육 수요자에게 평등과 공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구실을 정부는 내 걸었는데 이것이 대중에게 잘 먹혀들었다.
대학 입학 수능시험이 전국의 모든 대학 입학 지원자의 성적을 소위 객관식 문제에 의하여 완전히 서열화하는 것이 평등과 공정의 주된 내용이 되었다. 이 바람에 대학을 지원하는 고교생들은 생각함은 별로 필요 없고 객관식 문제의 답을 주입해 주는 것을 배우기만 하는 것을 능사로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이들은 고교 시절이라는 성장 발달 과정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모든 문제에는 누군가가 권위적으로 정해 주는 정답이 있는 것으로 알게 된다. 사실은 인간의 문제에는 정답이란 것이 거의 없고 인생이란 것은 자기가 평생에 걸쳐 써 나가는 자기만의 실존적 답이다. 그러므로 그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한 사회나 국가는 문명의 건설을 이루려면 개인들의 이런 다른 답을 만들어 가는 창조적 과정을 필수로 한다.
생각함이 부족한 대학에는 가르침과 배움도 함께 시든다. 7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대학에서는 불평등과 남북 분단이 지배적 객관식 문제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정답은 평등과 통일이다. 평등을 위해서는 경쟁이나 성장은 악이 된다. 통일을 위해서는 반외세(反外勢)가 목표가 되며, 반외세를 구호로 걸었기 때문에 김일성 김정일의 군사적 세습 정권은 비록 인민을 압제하고 황차 굶기더라도 선(善)이 된다. 게다가 그들은 평등도 그 이념으로 내걸고 있음에랴.
생각함은 개인적인 특질이다. 공동체는 생각을 하지 못 한다. 공동체에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그 공동체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단 한 사람 또는 몇 몇 개인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들의 권력을 위하여 공동체의 생각에서 제외되고 보류된다.
대학은 배움보다는 생각함이 더 중요한 곳이다. 아니, 생각함 없이는 배울 수도 없는 곳이고 그렇게 배운 것은 모두 허망하게 되는 곳이다.
한 사람의 생각은 밖으로 내 놓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다. 훼손하거나 빼앗을 수도 없다. 훔쳐 갈 수도 없다. 어떤 생각을 하게 할 수도 없고 못 하게 할 수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하는 것은 거의 완전히 자유스럽다. 그리고 생각함말고는 어떤 사람도 진정한 자유가 없다.
민주주의 사회는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 생각이 다양해야 지탱 될 수 있는 사회다. 산업경제시대를 거쳐 정보경제시대로 진입한 다음 점점 더 경제는 자본이나 노동력 보다는 고급 기술자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은 대학이 기른다.
교수와 학생을 모아서 그들의 생각을 더 활발하게 가동시키는 곳이 대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개인의 머리 바깥으로 자유롭게 나와야 한다. 생각은 생각을 물고 일어난다. 그래서 지식은 확대적 피드백을 일으킨다.
개인이 혼자서 누리는 생각함의 폐쇄적 자유에서 여러 사람이 언론(speech)과 토론을 가지는 공개적인 자유로 확장하는 전용 무대가 대학이다. 언론과 토론은 생각함에서 연장된다. 지식 사회란 것은 개인들이 자유롭게 생각한 것을 자유롭게 언론하고 토론하는 사회다. 대학은 지식 사회의 핵심이고 전형이다.
민주(정치)와 풍요(경제)와 지식(문화)은 모두 자유의 산물이다. 대학도 자유의 산물이다. 자유가 없는 대학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꼽지 않는 대학은 대학도 아니고 대학의 역할을 할 수도 없다. 평등과 통일은 적어도 대학에서는 그 가치 서열이 자유와 경쟁할 수는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