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핑과 시찰을 마친 후, 평가회의에서는 왜 일본 대학생들의 토익점수는 한국 대학생들보다 낮을까, 왜 여학생들에 비하여 남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낮을까, 교과과정에서 학문적 과목과 실무적 과목을 한국에서는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등등의 질의가 이어졌다. 이러한 질의와 토론을 통하여 한국의 대학교육을 되돌아보게 된 것도 망외의 소득이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만찬 자리에서 이루어졌던 행복한 사회에 관한 쑤카다 교수와의 토론이었다.
필자를 초대한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의 쑤카다 교수는 행복한 사회, 이를 위한 시장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오랫동안 관심과 연구를 쌓아온 학자이다. 단순히 복지사회라면 몰라도 행복한 사회로 관심을 확장한다는 것은 경제학자로서 다소 이례적이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하여, 또한 30년 전 일본에 비하여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가벼운 반론으로 나는 시찰 과정에서 관찰하였던 야마구치대학 학생들의 밝은 표정들을 이야기하였다. 야외의 벤치에서 목재 테이블에 책과 노트를 펼쳐놓고, 강의 내용과 레포트를 토의하는 그들의 표정은 분명 밝고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가! 쑤카다 교수는 그것은 치열한 입시와 취업 경쟁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같은 행복이라며, 그나마도 최근의 취업난으로 기간이 크게 단축되었다고 아쉬워하였다.
UNDP의 보고에 의하면, 방글라데시 같은 저소득국가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고 한다. 쑤카다교수는 방글라데시를 여행한 경험과 그곳 출신의 유학생들을 지도한 경험에 바탕하여, 그러한 결과가 표본오차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빈곤국의 경우, UNDP에서 설문조사를 위하여 접근했던 사람들이 상류층에 보다 편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질과 행복이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평균적으로 상류층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높다. 일반적으로 물질적 성취는 다른 성취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본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잘 살게 된다고 해서 모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방글라데시나 일본이나 전체 사회의 행복은 유사한 것이지, 방글라데시가 높다고 볼 수 없다. 굳이 가름한다면, 방글라데시 국민의 준거집단이 국제사회로 확장됨에 따라 행복지수는 그 영향만큼 국제평균보다 낮아지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두운 결론에 이른 셈이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행복한 사회를 디자인하는 사람은 벽에 부딪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회를 이룬다. 사회를 이루는 동기 자체가 반사회적이며, 이러한 반사회성이 인간의 나태한 성향을 극복하고, 자신과 사회를 발전시킨다. 결국 신은 인간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여 인간의 소질을 계발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셈이다. 선량한 사람들의 목가적인 삶에서라면, 인간은 가축 이상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은 자아실현의 과정에서 신이 부여하는 일시적인 선물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작은 희망의 단서에 동의하였다. 다양한 자아실현에 대한 상호존중은 인간의 본성에 모순되지 않으며, 그것이 개개인의 행복에 필요한 존중을 조화롭게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하나의 봉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봉우리들이 있다. 각자는 자신만의 봉우리를 향하여 오르며, 그 동안 자신만의 모습으로 빛난다.
사회적으로는 다양성에 대한 상호존중이,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자신됨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을 때, 인간의 본성과 행복한 사회가 조화될 수 있다. 캠퍼스마다 입시와 취업이 함께 진행되는 이 치열한 시절에, 그래도 대학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타인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자신의 잠재능력에 대한 자기존중을 길러주는데 있다고 주장하면, 지나친 이상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