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관련해 학계에서는 무엇보다 논문 표절, 연구비 유용 등 비윤리적 사례를 철저히 감시ㆍ검증하고 적발될 경우 강력하게 제재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논문 문제만 보더라도 대필, 표절, 중복 게재 등 비윤리적 사례들이 하나의 관행처럼 자리잡고 있지만 학계에선 '도대체 어떤 게 표절인지' 가릴 수 있는 기준조차 제대로 없기 때문이다.
학계는 아울러 교수나 연구원들 스스로 윤리의식을 키우고 자정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사회적 여론을 조성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로 꼽는다.
학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그동안 수면 아래 있던 비윤리적 연구 관행을 근절할 수 있는 대책을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 부조리 차단 장치, 강력 제재안 마련해야 = 선진국에 비해 국내 학계의 경우 비윤리적 연구 관행들을 바로잡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다.
각 대학들이 자체적으로 교수 윤리 강령을 만들고 연구비 유용 등을 막기 위해 연구비중앙관리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자정 노력을 펴고는 있지만 이 역시 최근에 나타난 자정노력일 뿐이다.
서울대의 경우 작년 7월 공대 일부 교수들이 연구비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교수, 연구원들의 윤리의식 제고를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했다.
여기에 올해 초 국내외를 뒤흔들었던 황우석 박사팀의 논문조작 사건은 이런 자정노력을 확산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황 박사가 몸담았던 서울대는 지난 3월 교육ㆍ연구ㆍ사회참여ㆍ봉사ㆍ학교운영 등 활동에서 교수들이 준수해야 할 사항을 담은 '교수윤리헌장'을 공포한데 이어 이달 초 '연구진실성위원회'를 발족했다.
연구진실성위원회는 과학기술부가 일정액 이상의 연구비를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대학, 연구기관에 올 연말까지 설치를 의무화하도록 한 것으로, 앞으로 각 대학이나 연구기관 내 부정행위를 감시하고 계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연구비 관리 문제와 관련해서는 1999년 두뇌한국(BK)21 1차 사업 시작과 함께 국가 지원 연구 프로젝트가 대폭 늘어나면서 연구비를 학교 본부에서 통합ㆍ관리토록 하는 '연구비중앙관리시스템'이 학교별로 도입됐다.
서울대의 경우 연구비중앙관리시스템의 핵심 기능의 하나로 연구에 필요한 모든 기자재, 물품 등을 구입하는 창구를 하나로 통일하는 물품관리시스템을 구축, 지난달부터 농업생명대, 공대 등 두 단과대를 대상으로 시범 실시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전 단과대로 확대 실시한다.
물품관리시스템은 과거처럼 연구 물품 등을 교수들이 각자 '알아서' 구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본부의 통합 시스템을 통해 구입, 정산이 이뤄지도록 하는 시스템으로 '교수들은 일절 연구비를 만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조치인 셈이다.
서울대 관계자는 "이전까지는 교수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연구비를 어떻게, 어디에 쓰는지 확인하고 관리할 방법이 없었던 게 사실"이라며 "새 시스템은 과정상 다소 불편하더라도 투명성 제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논문 표절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사학법이나 교원임용법 등을 개정해 표절 근절 규정을 명시하고 논문 심사 과정을 보다 투명하게 하는 등 더욱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를 들어 논문 심사위원들의 실명을 공개해 투명한 심사를 하도록 하고 표절 사실이 드러날 경우 해당 교수에게 급여 삭감, 교수직 박탈, 임용 취소 등의 강력한 제재를 취해야 하며 표절 여부를 공정히 심사할 수 있는 별도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김정인 정책위원(춘천교대 교수)은 "미국의 경우 '연구윤리국'이란 기구에서 논문표절 시비 등을 공정하게 가리고 있다"며 "우리도 앞으로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공정하게 심사할 수 있는 제3의 기구를 만드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종학 경실련 정책위원장(경원대 교수)은 "무엇보다 부정사례가 적발되면 일벌백계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아울러 연구성과를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심사기구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논문 심사시 양적 평가가 아닌 질적 평가가 이뤄지도록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들도 많다. 즉 논문의 편수가 아닌 질로 인정을 받도록 현재의 평가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
1년에 몇편의 논문을 썼느냐를 기준으로 평가를 하다보니 표절, 이중게재 등 부조리한 관행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현재 교수임용, 승진 등에 적용되는 논문 평가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양적 기준에 의한 평가 방법"이라며 "단 한 편의 논문을 쓰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쓸 수 있도록 평가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 학계 자정노력 선행돼야 = 연구윤리 확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도 절실하지만 무엇보다 교수나 연구원들의 자정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일부에서는 논문 표절 등 비윤리적 관행 타파를 위해 인위적 감시기구 등을 만드는 것은 근본적 대안이 아니며 교수나 연구원들 스스로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 가도록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주목을 끌 만한 사례가 바로 한국행정학회이다. 김병준 부총리가 최근 자신의 논문 표절 여부를 심사해 달라고 요청해 주목을 받기도 했던 한국행정학회는 지난해 국내 학회들 가운데 처음으로 표절 관련 규정을 제정하고 학회 내 윤리위원회를 설치했다.
행정학회가 제정한 표절관련 규정에는 표절은 "원저자의 아이디어, 논리, 고유한 용어, 데이터, 분석체계를 출저를 밝히지 않고 임의로 활용하는 경우"와 "출처는 밝혔지만 인용부호 없이 타인의 저술이나 논문의 상당히 많은 문구와 아이디어 등 원문 그대로 옮기는 경우"로 규정돼 있다.
이 규정이 당시 주목을 끈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국내 학계에 '과연 무엇이 표절인지' 객관적으로 가릴 수 있는 기준이나 매뉴얼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규정 제정 책임자로 참여했던 유재원 한양대 교수는 "당시 행정학회 내에서 논문 표절 등과 관련한 불미스런 사태가 발생해 이를 계기로 표절 및 윤리 규정을 만들자는 얘기가 자발적으로 나왔던 것"이라고 제정 배경을 설명했다.
유 교수는 "회원들 간 많은 논의를 한 끝에 비윤리적 관행 타파를 위해선 궁극적으로 징계보다는 스스로 윤리규정을 지키도록 권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이는 우리 학계의 자정 능력을 믿기 때문이며, 다른 학회도 자극을 받아 앞으로 이런 자정 움직임이 확산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