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하여 오자, 고려의 고종(高宗)은 강화도(江華島)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때의 뱃사공 이름은 손돌(孫乭)이었는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중에 경기도(京畿道) 여주(驪州) 땅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것이 음력 10월 20일이었다. 이날은 몹시 추워 임금과 신하들이 배 안에서 몹시 떨었다. 그러나 배는 계획대로 용산(龍山)을 통과하여 한강(漢江) 하류인 강화도 부근에 이르렀는데 마침 그곳은 강물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으로, 그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가깝기는 하나 물살이 세고, 좌측으로 가면 많이 돌아가기는 하지만, 물살은 잔잔한 지역임을 손돌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손돌은 그날 날씨도 몹시 추울 뿐 아니라 조수(潮水)를 생각할 때 비록 험한 뱃길이기는 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만조(滿潮)일 것이므로 강화도에의 도착은 무난할 것이라 생각하고 우측을 택하여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그 배가 지금의 손돌목이라는 지점 가까이에 이르니 파도가 세어 배가 뒤집힐 지경인지라, 성급한 신하들은 사공 손돌이가 몽골군과 내통하여 고의로 이런 험한 곳으로 배를 몰고 왔다고 처형하려 하였다. 손돌이 그렇지 않음을 구구히 변명하려 했으나 믿어주지 않고 마침내 자기를 죽이려 하자 손돌은 자기의 생이 마지막임을 알고 “이곳에 띄운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당도할 것입니다”라고 소리치며 바가지 하나를 바다에 던졌다.
성급한 신하들은 바로 손돌의 목을 쳐서 배 뒷전에 버려두고 손돌의 말대로 바가지를 따라 조금 가서 손돌목을 지나니 파도가 잔잔해져 배가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에 임금은 크게 후회하면서 손돌을 살리라고 명했으나, 손돌은 죽은 지 오래되고 시체는 추위에 얼어서 얼음덩어리같이 되었는지라 강화도의 양지바른 강변 언덕에 정성 드려 묘(墓)를 써주도록 하였다. 이에 뱃사람들은 손돌의 시체를 그가 죽은 강변 언덕에 장사를 지내주고 손돌지묘(孫乭之墓)라 묘비(墓碑)까지 세웠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뒤 해마다 손돌이 죽은 음력 시월 스무날께가 되면 심한 바람이 불고 추위가 닥쳤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손돌의 원한이 맺혀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여 미리 큰 물결이 일지 않도록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전설에 근거하여 해마다 음력 시월 스무날께 부는 바람을 손돌이바람이라 하고, 그 무렵의 추위를 손돌이추위라 하게 되었다.
한편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강화부(江華府) 고적조(古蹟條)’에는 이 손돌의 사건을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몽고 병사에 쫓겨 해도(海島)로 피할 때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조에 강화도로 피난을 한 임금은 고종, 충렬왕, 충정왕, 희종 등 네 임금뿐이며 공민왕 때의 외적의 침입은 몽고군이 아니라 홍건적의 침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지도서’의 기록은 착오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