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제목은 <태극기 휘날리며>이다. 언뜻 영화가 풍기는 이미지는 애국주의다. 2년 전 시청 앞 광장에서 엄청난 파도를 일으킨 태극기와 '필승 코리아'를 연상시킨다. 태극기 휘날리며 '우리는 용감히 싸웠다' 혹은 '백두산까지 진격했다'는 암시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객석은 수많은 '구세대들', '친북 반미 정권'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는 세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3.1절 날 시청 앞에 모인 예의 '보수 우익 세력'이 경찰 추산으로 3만이었지만 '태극기를 휘날리며' 북의 인공기를 압도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백배도 훨씬 넘는다는 '데이터'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영화를 보고난 후 회의에 빠진다. 한국전쟁에 대한 감독의 시각을 의심한다. '태극기 휘날리던' 우리 국군을 폄하하고 왜곡하고 있다며 빨갱이의 발호가 극에 달했다고 개탄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중립적으로 보았다는 사람은 "전쟁이니 북쪽 포로를 학대하고 학살할 수 있다치자. 북쪽은 어쨌느냐. 그것도 보여주었어야 할 게 아닌가"고 말했다. 강감독은 이념을 초월해 한 가족이 전쟁 속에 무너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했다지만 체제와 이념의 문제는 극복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가 애써 피한 체제의 문제, 이념의 문제에 대한 세대간 논쟁에 어떤 해답을 기대한 것이 사회적 관심이 된 핵심일듯 싶다.
관객의 절반은 젊은 세대들이었다. 꽃미남 배우 장동건과 원빈을 등장시켰다는 제작자의 계산이 들어맞은 면도 있지만 한국전쟁을 애국주의가 아니라 중립적 인간주의에 기초하려는 기도를 했다는 점 때문이다. 여기서 '기도했다'고 표현한 이유는 양민을 학살하고 인민군 포로를 학대, 사살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휘날리는 태극기'가 더 압도적 분위기였다는 데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보수 세력권이 보는 '빨갱이 세상'은 허구일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반대의 허구도 지적하고 싶다. 전쟁을 보지 못했던 세대들이 전쟁을 겪은 세대들의 끊임없는 '빨갱이' 메시지를 몰 지성적이고 보수반동적인 사고의 산물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오류가 있다. 강감독 조차도 전쟁 10년 뒤에 세상에 태어났고 진보의 주류세력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세대의 경고는 아들과 손자를 위하는 본능에서 나오지만 도그마로 변해 굳어버리는 게 문제다. 도그마에 빠지면 변하는 세상에 출구가 없다.
작가 한운사는 40년도 전에 북쪽 장교가 남으로 피난 온 여인을 찾아 휴전선을 넘는 <이 생명 다도록>을 썼다. 영화의 완성도나 내용이 던지는 메시지는 엄청나게 변했다. 진화의 수단은 역시 시대의 흐름과 사물에 대한 지적이고 창조적 접근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