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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상 칼럼
한준상 칼럼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
[한준상 칼럼]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
읽음과 배움 결여된 헛소리 경계
한준상 연세대 교수 / 본지 논설위원
대학교수에 대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30대 교수는 대학원 수업에서 베낀 대로 가르치고, 40대 교수는 알고 있는 대로 가르치고, 50대 교수는 내키는 대로 가르치고, 60대 교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가르친다는 소리이다.

긍정과 부정이 교차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교수가 된 후 웬만한 나이에 이르게 되면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는 자기 확신이 서 있는 학문적 논리를 펴나간다는 그런 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와는 반대로 교수들이라는 사람들은 구제불능의 존재들이라는 비아냥거림일 수도 있다. 교수들의 지적 수월성 역시 ‘시금털털한’ 수준 그 이상은 아니라는 자조의 비난들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겸임교수, 객원교수, 연구교수들과 같은 교수직 종류가 늘어났다고 해서 학문적인 수월성이 함께 성장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교수로 취직하기만 하면 거의 학문을 포기하고 있다는 세간의 지적에도 그 나름대로의 근거가 충분하다.

잘 가르친다는 것과 잘 배운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다. 잘 가르쳤기에 학생들이 잘 배우게 되는 것만도 아니다. 교수의 가르치는 방법이 뛰어나지 않아도 학생들이 잘 배웠던 경우도 흔하다.

소크라테스는 인류 역사상 큰 스승이었지만, 그가 제자들에게 잘 가르쳤거나 모범교사였다는 이야기는 없다. 존 듀이 역시 잘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었다. 그의 교수 방법은 낙제점이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미리 배우는 사람이었고, 먼저 생각하는 스승이었다.

그들 스승들이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단 한번의 가르침으로 잘 배우게 만들면 그것은 좋은 가르침도 아니고 좋은 교수법도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교수가 학생 앞에 설 때는 지식을 자랑하거나 연기를 하려고 강단에 서지는 않는다. 가르침의 초점은 바로 학생의 배움에 있다. 그가 행하는 수업의 1분 1초 모두가 학생에게 온전히 바쳐져야 한다.

그렇게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는 교수가 먼저 배워야하고 먼저 읽고 와야만 한다. 수업을 듣는 한 학생의 배움을 위해서 교수가 먼저 읽고, 먼저 배워야 한다.

그래서 교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르치는 용기가 아니라 배우려는 용기일 뿐이다. 배우지 않고 가르치기만 하는 만용은 학생들에게는 정신적인 ‘독’이 된다.

교수들 개인들에 따라 지적인 수월성이나 학문적인 열정이 서로 다르다. 교수직을 월급쟁이로서의 직업안정도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학자로서의 교수로 삶을 마감하는 교수들도 허다하다.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있어서 분명한 것은 그들 스스로 읽은 것만큼 가르치게 되는 것이고, 읽은 정도로 알게 되는 것이고, 읽은 깊이만큼 생각하는 것이고, 읽은 것만큼 자기의 표현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교수들이 정년에 이르기까지 경계해야 될 것은 바로 읽음과 배움이 결여된 헛소리들일지도 모른다.

한준상 칼럼 | 입력 : 05-10-04 오전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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