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하고, 우리 학생들은 착하다. 수업시간에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반갑게 인사한다. 먼발치에서 선생을 발견해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일부러 쫓아와 한마디 인사라도 건네고 가던 길로 향한다. 아무리 많은 무리가 모인 강의실이라도 선생이 입을 열면 스스로 주목할 줄 안다. 서울 소재 대학에서 3년간 몸담은 연후에 접한 경우라서 그런지 그 예의바름은 이른바 ‘지방대’ 학생 고유의 특징이려니 여긴다.
청소년도 아닌 대학생이 착하면 다냐? 착하기만 하면 뭐해? 실력, 그러니까 사회에서의 경쟁력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지방대로 분류되는 우리 학생들이 서울 학생들보다 실력 면에서 월등하다고 고집 부릴만한 근거는 딱히 없다. 그렇다고 특별히 뒤쳐지는 점도 찾기 어렵다. 아무리 어려운 과제도 너끈히 수행한다. 사실 제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녔어도 그 차이는 백지 한 장인 경우가 다반사다. 더군다나 대학은 똑똑한 학생을 뽑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을 똑똑하게 교육시키는 전당 아니던가.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학생들을 두고 하는 애꿎은 실력 비교는 이쯤에서 접자.
우리 학생들은 소극적이다. 질문이 있어도 잘 안한다. 선생에게 아쉽고 모자람을 느끼는 표정이 역력한데도 입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괜찮은 일거리라도 소개할라치면 자기를 한껏 포장해 내세우지 않는다. 마당을 펼쳐 놓아도 좀체 흥겹게 뛰어놀지 않으니 답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방대 학생들의 소극성은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인 착하고 예의바름과 ‘동전의 양면’인지 모른다. 그런데 서울에 위치한 대학에서 지방대로 옮긴지 역시 3년을 지나면서 점차 또렷하게 다가오는 사실이 있다. 이들의 소극성은 바로 지방대 학생인데서 비롯된 일종의 ‘열등의식’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남들과 똑같은 기간 동안 엇비슷한 수고를 기울여 대학을 졸업해도 지방대 간판은 큰 도움이 못된다. 도리어 그것이 발목을 잡는 경우도 있다. 사실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 사이에 퍼져있는 정서가 그렇다는 의미다. 그릇된 인식이라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그러한 정서가 뿌리 내린 역사성도 무시할 수 없다. 어떤 소재지의 대학을 나왔는지에 따라 사회진출의 여부가 좌우된다고 믿는 학생들은 학기가 거듭될수록 스스로의 꿈과 가능성을 위축시킨다.
지방대 할당제 등을 통해 지방 출신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고마운 추세도 일부 있다. 누리사업을 통해 지방대 역량을 강화하는 프로그램도 가동 중이다. 실제 긍정적 성과를 적잖이 거두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우대정책도 따지고 보면 지방대 및 그 출신들은 보호가 필요한 특별 집단이라는 차별적 인식을 제도적으로 공고히 한 것에 다름 아니다.
착하지만 패배의식에 젖어 적극성을 상실한 우리 학생들의 기를 살려줄 묘약은 없을까. 서울에 있는 학원을 찾아 휴학을 하고, 입사원서를 들고 서울로 향하는 학생들의 현실이 지방대 교수인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