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홍보물” 인식 확고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한 이화여대 반승아(국어국문?24)양은 “미국 대학의 경우 캠퍼스에서 현수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다민족 국가이다 보니 학교 구성원 중 특별한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간혹 내걸리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게재되는 시기는 아무리 길어야 3~4일 정도며 날짜가 오래 경과한 현수막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또한 학생문화관 앞에 특정 보드를 만들어 이곳에만 홍보물을 게시하고 이외의 공간에 포스터나 게시물이 나붙는 경우는 없다. 홍보물을 게시할 때도 안 떨어지게 하려고 청테이프나 압정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 벽면은 늘 깨끗함이 유지된다.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이영훈(37)씨는 “얼마 전 한국의 한 대학을 가보니 교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나무들 사이에 어지럽게 걸려있는 현수막이었다”며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 대학만의 독특한 풍경”이라고 말한다.
텍사스 주의 엘파소에 있는 텍사스주립대학의 경우 총학생회장이 치러질 때도 현수막이나 각종 홍보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광고나 선전물의 크기 역시 편지규격으로 제한되고 현수막은 철저히 금지된다.
이러한 사정이 비단 미국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다. 해외 대학의 체류 경험이 있는 대부분 사람들은 “한국의 캠퍼스는 학술의 공간이 아니라 홍보물로 인해 무질서해졌다”고 지적한다.
영국 런던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푸드스타일리스트 배윤정(32)씨는 “영국 대학 특성상 캠퍼스가 한국처럼 모여 있지 않고 생활권과 어우러져 있어 단과대가 마치 하나의 사무실 건물로 착각할 정도”라며 “일반 상가에 적용되는 엄격한 간판 규제를 당연시 여기는 의식이 보편화되어 있어 캠퍼스에서 홍보물을 내건다는 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청결하기로 유명한 싱가포르의 경우 일반 거리에서 버려진 휴지 한 장 찾아볼 수 없는데 이런 질서의식은 캠퍼스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싱가포르 국립대 구내 학생게시판의 경우 게시판의 이용 용도에 따라 종교 등 게시공간이 철저히 구분되어 있다. 자신의 가치나 주장을 더 많이 전달하기 위해, 그 구분을 무시하고 하나의 포스터로 도배를 하거나 게시판을 무질서하게 사용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이미 대학 사회에는 ‘자율적인’ 규범이 뿌리내려 있는 것이다.
학문적 분위기가 캠퍼스 전체에서 묻어나는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역시 국내 대학 캠퍼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학문 비연관성의 요란한 벽보나 현수막 등은 찾을 수가 없다는 게 유학생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게시물 외에 신문가판대 역시 국내와는 다른 형태를 보인다.
국내 대학에는 학내에 들어오는 신문이 10여종을 넘으면서 함께 배포하는 공통 신문가판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다른 광고지가 쌓여 있거나 뒤섞여 오히려 학생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반면 해외 대학은 학교에서 발행하는 자체 학보 외에는 대규모 배포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한다.
반승아 양은 “학과나 단체에서 내는 소식지와 잡지가 있지만 대규모로 배포하는 경우는 없다”며 “우리나라처럼 학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무가지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과시용’ 아닌 ‘내실’에 충실해야
이와 같은 해외 캠퍼스 환경에 대해 연세대 유석춘(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캠퍼스에는 학내외의 크고 작은 행사를 알리는 천 조각이 학기 내내 장소를 불문하고 펄럭인다”며 “심지어 이미 날짜가 넘어 아무 쓸모가 없는데도 관리 소홀로 쓰레기처럼 캠퍼스를 더럽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미국 일리노이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영국, 일본, 필리핀 등 해외 다수 대학의 체류 경험을 갖고 있는 유 교수는 “그 어느 국가에서도 한국 캠퍼스와 같은 홍보물 문화는 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고 외국대학의 학생활동이나 학술행사가 우리나라의 대학보다 질과 양에 있어서 결코 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생이나 교수 등 관계자들의 참여는 훨씬 더 적극적인데 이렇게 캠퍼스 환경이 다른 것은 ‘홍보문화의 차이’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외국에서는 행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 행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 홍보의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기업의 신제품을 발표하는 자리라면 각계 각층에 알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게 의미가 있겠지만, 학내에서 열리는 학술행사나 세미나 등은 일반대중에게 행사를 알릴 필요는 없는 거죠.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화려함이나 요란함에 초점이 맞춰진 과시용 홍보가 태반이며, 이 기준으로 행사의 성공 여부까지 가늠하는 척도가 됩니다.”
국내 캠퍼스의 경우 ‘참여’를 위한 홍보가 아니라 ‘전시’를 위한 홍보에 치중하다 보니 현수막과 같은 매체가 활개를 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현수막 문화의 원류를 유 교수는 ‘중국문화’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세계 여러 대학을 가보면 중국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서 현수막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혁명 당시에 유행했던 붉은 글씨의 현수막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일정한 규칙을 통해 오래 게시되는 일은 없습니다.”
실제로 중국 내 상위대학으로 꼽히는 남경대학의 경우 정문을 통과해 교내로 이어지는 길에서 붉은 글씨의 현수막이 걸려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현수막 역시 ‘오늘은 당신이 남경대학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내일은 남경대학이 당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라는 남경대학의 교훈으로 상업적 수단이 아닌 ‘공익적’ 목적으로서의 현수막임을 알 수 있다.
스페인 마드릿대학에 체류경험이 있는 고려대 민용태(서어서문학과) 교수 역시 “캠퍼스에서는 대외활동의 총괄장소로 대학기숙사가 적극 활용돼 모든 활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며 “대학은 철저히 학문의 질을 높이는 학술행위가 최우선으로 현수막이 난무하고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우리나라 캠퍼스 문화는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일부에서는 함께 생각해볼 현안이나 사회 쟁점사항을 공론화하기 위해 현수막 등 홍보물이 이용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유석춘 교수는 “캠퍼스 환경의 수준은 그 나라 지식집단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점에서 보다 내실을 기하는 홍보방법이 마련되어야 한다”며 “IT와 멀티미디어 수준이 높은 우리나라의 장점을 살린 키오스크나 PDP, LED 등의 홍보툴로 대체하면 오히려 우리나라 대학의 특성을 돋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의경 기자> ekpen@campuslif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