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둘
역사적으로 위대한 발견이나 학문적인 업적을 세워 공을 인정받은 인물들 중에는 학자라기 보다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은 인물들이 더 많았다는 외국학자의 주장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들 지식사기꾼들이 활용한 기술들은 여러 가지였다. 남의 자료를 모아 ‘요리하기’, 요것 저것 ‘다듬기, 빼고 더하고 분칠하며 ‘장난질’ 하기 같은 것이었다. 늘 듣던 이야기이긴 하지만 새롭기만 할 뿐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대학가에서 지켜야 할 연구윤리에 대한 토론에 대한 주제들이 그것을 맴 도는 것만 봐도 그렇다. 여러 교수들이 이렇게 토를 달았다.
저명 교수 하나의 말씀: “연구윤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학자적 양심에 따라 자신이 연구한 그대로 결과물을 발표하는 것이다. 외국이나 국내 기관들의 연구윤리 규정을 봐도 대체로 이런 상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미국의 연구윤리국은 책임있는 연구를 위한 기본 규칙으로 정직성(정보를 정직하게 전달하고 약속을 지킨다), 정확성(연구 결과를 정확하게 보고하고 오차를 피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효율성(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하고 낭비하지 않는다), 객관성(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부당한 편견을 피하도록 한다) 등이다”
저명 교수 둘의 말씀:“연구 부정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부정행위인지 잘 모르는 경우, 또는 막연히 알고 있는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연구윤리와 관련하여 의식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한 경우와 학자적 본분을 잊고 욕심에 빠질 경우에도 발생한다. 그릇된 학문적·사회적 풍토가 부정행위를 조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며 우리 사회에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는’ 풍토와 따지지 않고 덮어버리는 문화, 그리고 남에게 후하게 인정을 베풀고 사는 것을 미덕으로 보는 온정주의 전통 등이 겹쳐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부정행위가 드러나도 엄격하게 처벌하지 않는 풍토 또한 원인이라 할 수 있으며 제도적 차원의 원인들도 연구 부정행위의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야기 셋/넷/다섯
엉터리 박사학위를 사들인 사람들이 또 무더기로 적발되었다는 소식이 연말을 장식했다. 전문직 종사자들이 더 많이 사들인다고 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지만 박사학위에 대한 사회적 의심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대학가는 학기말이 되면 학위 심사로 덧없이 분주해진다. 논문 심사를 기다리는 학생들을 만나면 건넬 말이 부족하기만 하다. 그저 최상의 말은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일 뿐이다. 정말로 뜻 없는 빈말일 뿐이다. 차라리, “심사위원들에게 대꾸하지 말고 그냥 잘 버티세요” 라고 조언하는 것이 더 나을 법 하다.
이야기 여섯/일곱/여덟/아홉
정부는 노벨상 수상에 대해 거는 기대가 크다. 일종의 강박감 같은 것들이다. 내친 김에 노벨상 수상이 가능하다고 본 10여명의 연구자들 선발했다. 한국대학에서도 노벨상이 수태되기 위해 정부는 저들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들을 국가석학이라고 추켜세웠다. 선발 기준은 저들의 논문에 대한 SCI 피인용 횟수였다. 국내학회지도 수없이 많이 있지만, 그것의 질은 개운하지도 깨끗하지도 않다는 판단아래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어쩌거나 SCI 인용횟수가 많을수록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높은 학자라는 대에는 이론이 없는 듯 했다. 저들에게 선택된 그들 국가석학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국내산 박사는 아니었다. 결국 정부는 저들에게 인공수정을 하는 셈인 것이다.
이야기 열
우리 대학가에도 붓다나 공자, 그리고 예수 같은 심성을 갖고 있는 교수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나 같은 일반교수들의 지적인 연구행태를 훑어가면 모든 것이 저들 위인처럼 무균질 바로 그것일 수는 없다. 대학 교수생활에 재미를 오래 붙인 사람일수록 더 그럴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대학교수들의 치부를 이리저리 까발리는 것도 교수에게는 점잖은 일이 못될 성 싶다. “남이 하는 것은 스캔달이고 내가 하는 것은 로망스”라고 우기는 것이나 마찬가지겠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돌아올 메아리도 공허하기 마련이다. “너나, 제발 좀 잘 하세요”, 그 소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