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에서 연재하는 칼럼입니다.
압축모방의 근대화, 산업화와 혼성모방의 지식정보화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은 그 모방의 고리를 풀고 발전을 스스로 이끌 주체, 즉 ‘사람’에 대한 성찰이다. 호흡조절기의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이 긴 호흡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인문학의 자기변화가 절실해지고 있다. 바둑판에서 한수 한수에 급급하면 제대로 집을 지을 수 없지 않겠는가? 기술과 시장과 인간의 균형을 잡아줄 인문학이 교실 안과 밖에서 제자리를 잡고, 인문학 스스로 자기유지와 자기변화를 다잡아갈 수 있도록 인문학 위기의 담론은 시의 적절하게 제기되었다.
인문학의 자기변화를 현실화하기 위해 수행인문학은 지식정보사회의 변화를 수행하면서 인문학 본연의 균형을 실천적으로 다잡기 위한 길을 제시한다. '왜'를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인문학과 '어떻게'를 밝혀내고 찾아가는 수행성(performativity)의 결합을 구체화한다. 수행성은 행위와 언어의 의미 구현, 소통의 주체 구성, 사건과 상황의 변화 형성에 대해 '어떻게'와 '무엇을 위해'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는 관점과 역량에 주목한다. 사람이 만든 것이면서도 또한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들, 즉 사회, 문화, 권력, 시장, 역사 등과 사람사이의 역동적 균형과 변화를 규명하고 수행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압축모방의 결과로 인한 위기는 대학의 위기로 이어질 태세이다. 또 다시 우리의 대학들이 압축적인 모방과 가시적인 성과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아웃소싱에만 의존하면서 인재들을 선진국으로 보내 기술과 학문을 배워오게 하고 후학을 키우지 못한 채 소진되는 사태가 계속 반복되어서는 선진사회로의 진입장벽을 절대 낮춰볼 수 없다. 연구력 자체와 교육력 자체를 경쟁력 있게 만들고 사람을 키우고 사람에게 보답하는 노력이 없이는 결국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공계 졸업생의 사회활동 수명이 짧아지고, 인문계 졸업생의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이공계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가 동시에 터져 나와 모처럼의 건설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틈에서, 분파 학문의 이익을 챙기고, 고구려와 독도를 위해 국학을 도구화하고, 연구비로 영양주사를 맞는데 급급한다면, 성찰과 재생의 기회는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위기와 우리 대학의 위기와 우리 인문학의 위기는 연결되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자들의 자발적인 변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유지만큼 자기변화를 끌어내야한다. 지키는 노력과 바꾸는 노력이 같이 손을 맞잡을 때,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지 판단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람이 숨쉬는 시장'을 위해서, 인문학자들은, 시장이 바로 그사람들이 '왜'와 '어떻게'를 찾으면서 생활하는 현장이라는 각성을 살려내야 한다.
역사적으로, 특히 선진 사회에서 인문학 자체가 위기에 처한 적은 없다. 인문학의 위기란 정확히 표현하면 인문학의 환경이자 대상인 그 사회의 위기이다. 근대 한국의 인문학은 전통과 서구화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세계관의 지평을 넓혀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에 대한 고고한 향수는 아직도 진하다. 자빠진 것은 위기가 아니다. 자빠져서 일어나려 하지 않은 채, 손만 내밀고 남의 탓으로 침이 마를 때 위기는 자초된다. 우리가 맞닥트린 장벽은 단순히 기술과 시장의 장벽이 아니다. 진입 장벽은 기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있다.
혼성모방의 엔진을 끄지 않고, 그 압축적인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다시 살리기 위해서 위기의 담론은 기회를 제공해야한다. '같이 생산하는 자'(conducer)인 '생산하는 소비자'(prosumer)와 매듭을 엮고 있는 21세기의 자본과 기술과 시장은 이제 인문학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과 함께 해야만 창출되는 부가가치에 주목한다면, 또한 변화에 적응하고 변화를 이끌어갈 인재의 필요를 절감한다면, 인문학 연구와 교육은 인문학자들만의 문제에서 그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