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에서 연재하는 칼럼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더더구나 옳다 그르다 단정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상아탑의 이상과 사회의 현실은 서로 무관한 일이 아니라 상호 밀접하게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학문은 왜 하는가? 대학은 무엇인가? 물었을때 그것을 고담준론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대학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지만 <현실>을 외면하고서는 존립할 수 없다. 인재와 기술, 사상과 철학은 대학에서 나온다. 대학은 사회의 버팀목이다. 대학은 때로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을 펴지만 그것은 현실을 몰라서가 아니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이상을 제시하기 때문에 현실과는 큰 갭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현실과 이상은 유리돼 있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말하면 어떤 형태든 교수가 가진 지식, 지혜, 기술을 나누어 갖는 데는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교수의 신분을 유지하고 정치권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논쟁의 촛점일 것이다.
먼저 긍정적으로 보자. 교수가 갖고 있는 지식과 이론과 경륜을 사회현상을 개선하는데 기여하겠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특히 사회과학은 사회현상과 표리관계에 있다. 이론과 실재의 접목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발전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면서 우리 삶의 향상에도 이바지 하지 못한다면 그 학문은 존재할 의미가 없다.
두번째로 대부분의 사회과학은 사회현상과 문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상호 교직된 상태에서 대학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러므로 행정학이나 의회론을 가르치는 교수가 국회의원의 경험을 갖는다면 그것은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세번째로 대학은 엘리트의 산실이다. 정치권의 새로운 인재 수혈을 대학이 맡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
넷째 대학교수도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다. 한번 교수가 되었다고 해서 평생 교수로 남아야 한다는 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대학 사회는 좀 독특하다. 수직적 조직이 아니라 수평적 조직인 탓에 모두 제 잘난 맛에 산다. 어떤 서울 대학교 교수 한 분은 서울대 교수는 모두 ‘장관급’ 교수라고 자부하고 있음을 스스로 비판하였다. 서울대만 그러한가? 웬만한 대학의 교수는 ‘총장급’ 교수들이다. 처음 부임하면 한 10년간을 열심히 가르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교수님, 박사님 칭호는 지겹고 위원님, 이사님, 장관님 등의 호칭이 그리워진다.
좋게 말하면 자기 이론을 실험해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게 된다. 그리고 물이 들면 바깥으로 돌게 된다. 40중 반으로 접어 들면서 ‘감투’에 관심이 커진다. 응용 학문의 경우 현장 경험이 소중하다는 명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바깥의 벽이 높은 것을 알게 되면 학내에서 움직이고 학장, 원장, 총장…감투를 탐하게 된다.
소위 행동하는 지성인 (action intellectuals)은 미국 케네디 행정부 이래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하바드의 엘리트들이 여럿 발탁되면서 교수들의 정치 참여는 새로운 조류가 되었다. 각국의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몇가지 확실하게 해 둘 점이 있다. 하나는 강의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장기휴직은 학과와 학생에게 고스란히 피해를 가져다 주게 된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정외과 K모 교수는 YS 시절 요직에 발탁되자 교수직을 흔쾌히 사임하고 관계로 떠났다. 떠난 자리가 정말 아름다웠다. 만면 N아무개 교수는 8년의 의원 노릇을 하다가 돌아왔지만 동료 교수들의 반대로 복직이 좌절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교수직을 띔틀로 이용하는 일부 인사들의 작태이다. 이 캠프 저 캠프 줄을 대고, 기회를 엿보는 철새 교수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대학의 수치다. ‘출사’에 앞서 적어도 삼고초려의 예를 받을 만큼 역량과 품격을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다. 외국처럼 교수의 공직 진출의 기간과 횟수를 제한할 필요도 생겨났다.
대학은 ‘오리알’의 안식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