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초년병 시절, 연희동 골목에서 ‘말뚝’ 근무를 섰습니다. 초병(哨兵)도 아닌데.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후계자인 6공(共)의 공세로 백담사로 막 쫓겨가기 직전이었지요. 그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초미의 관심사였지요.
제 임무는 그 집으로 누가 들어가고 누가 나오는지를 체크하는 것이었지요. 연희동 동네의 골목마다 전경들이 진치고 있었습니다. ‘주민 외 출입 불가(不可)’였지요. 이 때문에 그 집까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좀 떨어진 골목에서 저는 목을 빼고 서있었지요.
아무런 뉴스가 없었고, 기사 한 줄도 안 됐지요. 만일의 사태 때문에 그냥 보초서고 있었던 것이지요. 첫날과 둘째 날을 그렇게 골목에서 말뚝처럼 박혀 있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한 주민이 제 주위를 어슬렁거렸습니다. 기회를 엿보다가 심중에 있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정말 멋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민완기자 같군요”라고.
셋째 날 저녁에는 비가 왔습니다. 남의 집 대문 처마 아래로 들어가 서있었습니다. 후줄근한 기분이었지요. 그때 관할 경찰서장이 순찰을 나왔다가, 출입기자의 행색을 본 것이지요. 그는 탄식하듯 “좋은 대학 나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될 양반이 이런…”이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수 차례 달래고 설득해서 저를 술집으로 ‘연행’했습니다. “그만 고생하고 대포나 한잔 하러 갑시다. 만약 여기에 무슨 일이 있다면 내 무전기로 모든 상황이 보고될 거요”라면서.
저는 거의 날마다 ‘오늘 사표 쓸까 말까’를 생각하며 출근했는데, 그 시절에는 주변 사람들이 기자 직업을 제 자신보다 더 이해하고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 며칠 전에는 서울경찰청의 한 정보담당 직원이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대기업 홍보실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이런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이지요. “혹시 기자들과 2차 술자리를 가지 않았느냐?”고.
청와대의 높고 비뚤어진 양반이 기자들을 ‘비리 집단’인양 몰아가니, 일선 경찰까지 공을 세우기 위해 이렇게 제 발로 나서 기자들의 뒷조사를 벌입니다. 어떤 공무원들은 업무에 대해 취재하면 “내가 왜 당신 말에 답변해야 해?”라고 기세등등하게 나오지요. 틀림없이 청와대의 칭찬을 받겠군요. 국민의 알권리 따위를 운운하면 아마 소가 웃을 세상이 됐습니다.
모방송국 후배기자와 저녁을 먹는데, 매사 깔끔하게 처신하는 그가 “이제 그만 기자를 떠나고 싶다”고 털어놓더군요. 그의 지갑 안에는 부인과 돌도 안 지난 아이 사진이 붙어있더군요. 집에 있는 가족을 사진으로만 보겠다는 것인지. 사건담당인 그는 날마다 자정쯤 퇴근합니다. 그는 우울하게 말했지요. “우리를 ‘죽치고 앉아 담합하는 집단’이나 파렴치범처럼 모는 분위기에 심적으로 견딜 수 없었다”고. 세월의 때와 녹이 많이 묻은 나는 갑자기 후배가 낯설게 보였지요.
요즘 기자직을 떠나는 동료와 선후배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선거철이고 또 개인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는 기자 직업의 자부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어느 직업도 모두 존중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기자 직업이라고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다 밥벌이지요. 그럼에도 기자에게는 응원이 좀 필요합니다. 대다수 정신이 바로 박힌 기자라면 자신을 위한 돈벌이와 ‘웰빙’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공(公共)의 정의를 위해 뛰고 있다는 자존심으로 사는 것이지요. 그런 헛된 자존심 때문에, 출근 시각 구두를 신다가 “누구네 남편은 연봉이 얼마인데” “그집 딸은 고액의 수학 과외를 받는데”라는 아내의 지나가는 말에 버럭 화를 내고 상처 받습니다. 그 자존심은 매사에 비판적이고, 권력에 냉소적이고, 곧잘 큰소리 뻥뻥 치고, 기분 나쁜 것과는 타협을 잘 하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또 상상을 초월하는 고된 근무조건을 이겨내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럴진대 차라리 기자가 없는 세상을 한번 만들어볼까요.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