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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방의 감격, 그러나 처음부터 잘못 낀 첫 단추.
우리는 정말 해방되었던가?

해마다 한여름 8월 15일만 되면 광복절 행사를 열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진정 해방되어 민족의 광명을 되찾았던가?

1945년 9월 8일.

미 육군사령부 맥아더의 대리인 재조선 미군사령관 중장 하지(Jone R.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인천항에 상륙한 다음날 아침, 국민들은 서울에 입성하는 미군들을 연도에서 열렬히 환영했다.

한국인들은 이날 태극기와 함께 미국의 성조기도 들고 나갔다. 태극기도 그리는데 까다로왔지만 성조기야말로 무슨 놈의 별이 그렇게나 많고 흰줄은 몇 개나 그려야 하는지‥.

이런 걸 한국인들은 밤새 그려 길거리로 들고 나가 새벽부터 기다리다가 만세를 불렀다.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준 고마운 우방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그러나 이날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등은 국민을 대표해서 하지 사령관을 만나려 했지만 상대도 해주지 않는 통에 망신만 당하고 돌아왔다. 반면 미군은 일본 총독부 관료들을 만나서는 그들에게 계속 남아줄 것을 부탁했다. 자기들이 그만 두라고 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들을 내쫓지 못한다는 보장까지 해주면서.

이처럼 미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하고 환영하던 우리 민족의 정서와는 달리 그들의 상황 인식은 사뭇 우리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 사령관 하지가 당시 부하 장교들에게 한 말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국은 미국의 적이었다. 따라서 항복조건(surrender)과 절차에만 따라야 할 것이다".

하지의 이 같은 태도는 그 후 전남 광주에 부임했던 한 중대장교가 한국인으로 임명된 민간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내뱉은 대답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국은 적국과 같이 우리에게 무력으로 점령당했다. 물론 우리는 당신네 국민들을 죽이러 왔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험악한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상황을 잘못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점령의 개념을 확실하게 전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미군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한국에 왔다는 사실은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 되었지만.

국내·외에서 민족의 광복을 위해 죽음까지 바쳐 온 수많은 애국자들이 있었지만 해방이든 분단이든 당시 우리나라의 운명적 결정은 모두 일본과 미국, 소련 등 강대국의 패권 싸움과 정략에 따라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여름방학이어서 학교가 모두 쉬고 있었다.

나는 이때 고향에서 라디오 앞에 앉아 일본왕 히로히토의 항복문 낭독을 들었다.

결사 항전패들의 방해 탓인지 잡음이 너무 심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호꼬오 오사메루(창을 거두다)"라는 말로 보아 분명히 항복한다는 뜻이었다.

이 무렵 소련군이 청진까지 진격해 있었다는 소문은 우리 마을까지 들렸지만 일본 왕의 항복문 낭독으로 소련의 점령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들은 미군이 한반도에 오기 전에 먼저 제주도까지 내려가 낫과 망치의 붉은 깃발을 꽂아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8월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그리고 38선을 넘어 내 고향 황해도 연안읍내까지 따발총을 들고 나타났다. 38선을 넘지 않기로 한 약속도 어긴 것이다.

당시 미국이 8월 10일 밤 긴급회의를 소집해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내놓지 않았으면 아마도 한국 땅은 제주도까지 집집마다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초상화를 걸어두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에 앞서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는 원폭 한방으로 도시 전체가 거의 초토화되었다. 일본은 이제 버섯구름으로 피어오르는 이 신형 폭탄 한방으로 전의를 상실했다. 그런데 미국은 이틀후인 10일 또 한방의 원폭을 나가사키에 투하함으로써 사실상 2차 대전을 마감하는 결정타를 날렸다. 결국 일본 왕이 소위 대본영 벙커에서 기어 나와 백기를 흔들었다. 세 번째로 도쿄에 원폭이 떨어지면 자기는 물론 일본인 대부분이 피해를 입을 판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 본토가 초토화되고 있을 때 소련군은 한반도 끝머리에 미리 깃발을 꽂은 권리로 남하하면서 한반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반도 지도를 놓고 단 몇 분 사이에 허겁지겁 38선을 긋고 한국을 나눠먹자고 한 미국의 발상이 우리에겐 큰 재앙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당연시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배경이다.

이처럼 우리 땅은 수렵의 사냥꾼에 의해 노획되고 그들이 나눠 가진 전리품에 불과했으며, 장차 민족 최대의 비극이라 할 6·25 전쟁의 고통을 안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채 반세기를 따로 사는 불행한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땅 한쪽에 상아탑을 세우고 꿈을 부풀리며 몸부림쳐 왔던 것이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조국은 분단되고 남한은 3년간에 걸친 미군정 치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미군정기의 3년은 한국 현대 교육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교육 방향과 기초를 결정하는 시기로 자리 잡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무엇보다 시급했던 문제는 일제 치하에서 왜곡되고 유린

되어 온 교육체제를 바로 잡고 민족교육을 부활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교육체제를 관장하던 학무국(지금의 교육부) 초대 국장이 민족교육과는 거리가 먼 미군 대위에 의해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도 그리 많지는 않다.

더욱이 교육체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구성된 인사 대부분이 점령군인 미군측의 젊은 장교와 일본인 관료, 친일 한국인으로 시작됐다면 이보다 더 큰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을까?

일장기가 일본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내려진 것은 9월 9일 오후 4시 30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감격의 순간일 수도 없었다. 일장기가 내려지면서 그 자리에 자랑스럽게 올라간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바로 성조기였기 때문이다.

이날 아침 일본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로부터 정식으로 항복문서를 받은 하지 사령관은 곧 이어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이하 일본인 국장들에게 미군정의 행정고문으로 계속 남아 줄 것을 부탁했다. 해방 초기 미 군정청은 한국인들 스스로 자치활동이나 교육 활동을 펴나갈 능력이 부족하다는 시각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각은 하지가 당시 기자단에게 한국 정세에 대해 언급한 말 가운데에서도 진하게 베어 나온다.

"한국인들은 즉시 독립을 요구하는 것 이외에 이것을 달성하는 아무런 방법도 가지지 않았고, 실로 나에게 필요한 지식을 주는 사람은 일본인뿐이다".

하지는 9월 10일 미 육군 제7보병단장 출신의 아놀드 소장(A. B. Arnold)을 초대 군정장관에 임명하고 그를 중심으로 행정기구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월 11일부터 9월 17일까지 총독부 8개국 국장을 모두 전문성과는 거리가 있는 미군으로 임명했다. 특히 총독부의 기구 및 인원을 이용한다는 방침에 따라 일제 시대 총독부 관료 조직을 그대로 부활시켰으며, 일본인 관리들이 자문을 맡도록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교육체제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일본인 또는 친일 한국인 관리들을 등용하고 그들의 신분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교육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한국 교육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아놀드에 의해 11일 교육담당관으로 임명된 미 육군 대위 락카드(E. L. Lockard)는 곧 이어 미군정청 학무국의 초대 국장이 됐지만 교육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했고 한국실정에는 더욱 캄캄했다. 때문에 그는 총독부 마지막 학무국장이던 한국인 엄상섭(嚴祥燮)에게 모든 자문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엄상섭으로 말하면 일제가 내선일체의 실제적 증거를 보여주려고 처음으로 그런 고위직에 한국인을 앉힌 대표적 인물로, 전주사범을 나와 잠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사법고시 합격 후 검사직에도 있었던 거물 친일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락카드 대위는 처음부터 총독부 동쪽의 방 하나에 공보담당 사관들과 함께 섞여서 매일 엄상섭을 만나 배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엄상섭은 오천석(吳天錫), 유억겸(兪億兼) 등을 소개해주고 뒤로 물러났다.

락카드는 기본 정책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초기의 거의 모든 실무를 이들에게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천석은 영어에 능통한 미국통 교육자였으니까.

이때 처음으로 오천석의 제의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9월 16일 발족된 한국교육위원회다.

그런데 우리나라 문교 행정의 효시가 됐으며 이후 교육체제 개편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한국교육위원회는 과연 어떤 인사들이 모여 어떤 일들을 처리해 나갔을까?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3-06 오후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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