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 홈 > 뉴스 > 사회

목록
프린트 스크랩
(7) 국대안 파동의 시발
1946년 7월 13일.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장기 대신 성조기를 매달고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그렇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무더운 여름인데도 천장에 매달린 기자실의 선풍기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가 많아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여기에 유억겸 문교부장이 오천석 차장을 대동하고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특종감을 전달했다. 오천석의 설명으로 전격, 발표된 것은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이하 국대안)]이었다.
" 언제부터 실시됩니까?"
" 여러 학교들이 갑자기 이름도 사라지고 한데 묶일 모양인데 협의를 거쳤습니까? "
" 지금 우리는 아직 우리나라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나라도 없는데 무슨 국립대학입니까? "
" 총장은 미군입니까 아니면 한국인입니까? "
기자들은 이날 발표의 중대성과 돌발성으로 인해 순식간에 더위도 잊은 채 질문을 퍼부었다.
사실 기자들은 그 동안 이미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는 [국대안] 냄새가 유억겸과 오천석의 주장에서 속속 배어 나오고 있었고, 사냥개처럼 후각에는 남 달리 예민해야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몇 차례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오천석은 그런 것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라고 잡아떼었다. 미리 정보가 새 나가면 말이 많아져 죽도 밥도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예고도 없이 발표를 했기 때문에 기자들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날의 국대안 발표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최고로 알아주는 '위대한 서울대' 탄생의 출발점이 됐지만 그 무렵에는 그것이 교육계의 누구에게도 별로 큰 축복과 기쁨의 메시지가 되지 못했다.
기자들의 질문대로 나라도 없는데 국립대학이라니 말도 안되는 노릇이지만 그런 형식적인 문제를 떠나서 총장이 미국인이 되고 공립학교 전체를 그 통제 하에 두게 된다는 것이 아무래도 찜찜했기 때문이다.
이날 유억겸 문교부장이 기자들에게 부연 설명한 국대안의 취지는 이렇다.
"국립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각 학교의 기존 건물과 설비를 최대 한도로 활용하고 유능한 교수의 상호 교류와 교수의 연구 시간을 많이 갖게 하며, 국가의 재정 절약과 다른 학교의 장점을 누구나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
그리고 "일반은 이번 조치를 합병으로 오해말고 일정 시대의 것은 전적으로 폐지하고 새로이 종합대학교를 세워 각 분과의 대학을 두는 것으로 알아주기 바란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일제시대로부터의 유물인 기존 교육기관을 그대로 존속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새로운 국가에 적합한 고등교육기관으로 그것들을 개조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국대안의 골자는 한마디로 압축하면 '통폐합안'이었다. 없앨 것 없애고 합칠 것 합치고 전체를 하나로 묶어 중앙사령탑의 통제 하에 들어가는 커다란 조직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문교부가 밝힌 국대안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기존의 경성대학과 서울 근교에 위치한 관립전문학교 등 9개 전문학교를 폐지,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개편해 9월 신학기부터 시행한다는 것으로, 학문 자유 보장을 위해 최고정책결정기관인 민선 이사회를 별도로 두는 것 등이었다. 다만 민선 이사회가 조직될 때까지 잠정 조치로 미군과 문교부 간부로 구성된 임시이사회를 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통합대상이 된 학교는 당시의 경성대학(법문학부, 이공학부, 의학부)과 경성의학전문, 경성치과전문, 경성법학전문, 경성광산전문,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 등 총 10개에 달했다.
이밖에 예술대학을 신설하며, 이를 9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9개 단과대학은 문리과대학(경성대학 문학부, 이학부), 법과대학(경성대학 법학부, 법학전문학교), 사범대학, 의과대학(경성대학 의학부, 의학전문학교), 상과대학, 공과대학, 치과대학, 농과대학, 예술대학(음악부, 미술부) 등이었다.
그리고 이날 발표는 한달여가 지난 8월 22일 미군정에 의해‘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군정법령 102호)으로 공포됨으로써 법적 효력을 발휘,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이날 일반의 이해를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장문의 성명까지 덧붙인 문교부 발표는 사전에 고등교육기관 재편성에 대한 어떠한 정책구상이나 합의도 도출되지 않은 가운데 나온 것으로 학원가에 논쟁의 불씨를 지피는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국대안은 미군정기 대학사에 있어 광범위한 저항과 유혈 사태까지 야기하는 사건으로 기록되면서 해방 후 역동적으로 재편되는 정치상황과 맞물려 급기야는 이념 갈등과 친일파 배척, 학원 민주화 등을 주요 쟁점으로 하는 교육 주도 세력과 비주도 세력간의 본격적인 세 대결 양상으로 확대돼 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군정청의 동의 아래 국대안의 입안과 실행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오천석 문교차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 ○ ○ ○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와 비슷한 시기에 북쪽에서도 국대안이 추진되고 있었다.
평양의학전문학교와 공업전문학교를 통합한 [김일성 종합 대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학은 1946년 10월 1일에 개교하였다.
그리고 서울대는 한달쯤 앞서서 8월 27일 개교하였다. 그러나 온갖 반대에 부딪쳐서 개학식은 김일성대와 3일 차이로 9월 28일에 열렸다. 그리고 동맹 휴학 등이 그 뒤에도 여전히 계속되어 수업이 되지 않았다. 반대하는 교수들도 1백60여명이나 파면되고.
정부 수립 시기도 양쪽이 비슷한데 국립종합대학까지 같은 시기에 남북 양쪽에서 추진된 것을 보면 남북이 따로 따로 살기 위해 발걸음도 잘 맞추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우리의 종합대학안이 나온 동기가 북쪽의 종합대학안 출현과도 관련이 있을까?
혹시 그들이 만드니까 우리도 만든다는 식일 수도 있지만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군비경쟁이 아닌 이상 미군정이 오천석 등을 시켜서 만들었으리라고 짐작되는 국대안의 출현은 그와는 상관없이 현실적인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좌익 계열의 무분별한 활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방되던 해 12월 어느 날 김태준(金台俊)이 경성대학 총장으로 선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국어학자 이숭녕이 손인수에게 들려준 증언에 의하면 동숭동 캠퍼스에 있던 젊은 조교들이 12월 어느날 갑자기 한길 바로 건너편에 있는 의대 강당으로 몰려가 경성대 총장으로 김태준을 선출했다는 것이다. 김태준은 한국 최초의 [조선소설사]를 저술한 인물이다.
이숭녕과는 경성제대 시절에 조선어학회를 만든 동학 동문인데 그는 한때 중국 연안까지 망명해 갔다가 귀국했던 열렬한 커뮤니스트였다. 그리고 나중에 남로당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된 것이다.
이숭녕에 의하면 "그는 죽기 전 최후 진술에서 [나를 살려주면 내 학문을 대한민국에 이바지하는데 쓰겠다]고 해서 이른바 북한 공산당의 의사(義士) 명단에도 오르지 못한 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는 순간까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더라도 그는 북한의 역사에는 남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로당 계열은 거의 모두 미제 스파이로 숙청되었으니까.
어쨌든 8·15 후 경성대는 엄연히 미군에 의해서 접수되고 미군 총장 크로포트가 있는데 조선놈들이 총장을 따로 뽑는 국민이 되겠다니 미군정 당국이 좌시할 리가 없었다.
" 돼지새끼들 … ."
돼지가 어떻다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해지던 하지 사령관의 입에서 튀어나온 '피그(pig)'는 돼지고기가 맛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사람을 경멸할 때 우리는 흔히 개새끼라고 하지만 그들은 흔히 돼지라고 한다.
12월의 반란은 이렇게 총장 선출로만 끝나지 않았다. 조교들은 교수들도 뽑았다. 각 전공분야의 담당교수 일람표까지 작성해서 학교에 제출한 것이다. 이걸 보고 이번에는 김태준의 선배 동문 교수이면서 '국문학사'의 저자인 조윤제부장이 소리를 치며 화를 냈다.
"이 자식들아, 이 꼴로 무슨 교수진 선정이야"
조윤제 교수 앞에 나가면 잘해도 칭찬 받기 어려운데 일람표에는 전공도 제대로 안 맞는 교수가 있었기 때문에 당장 잡아먹을 듯이 화를 낸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학교 안에서는 서서히 사회주의만이 아닌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자주성을 주장하는 비판세력이 등장하고 있었으며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미군 사령부가 여기서 느낀 것은 무엇일까?
첫째, 그것은 점령군으로서의 미군에 대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미군은 해방군으로서가 아니라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진주했고 일제 지배하의 모든 재산과 식민지 백성들까지 접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김태준 사건이 미군지배로부터 우리의 자주적 권리를 찾으려는 것인 반면 미군은 이를 묵과할 수 없는 도전과 반란으로 보았을 것이다.
둘째, 그것은 소련의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도전이었다. 즉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미국을 방어하기 위해서 한반도에 진주하고 있던 미국 안보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김태준이 커뮤니스트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젊은 조교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오직 민족적 자존심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총장과 자주적 운영권을 획득하려 했겠지만 미군사령부는 모두 비슷한 빨갱이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 사령관이나 러치 군정장관은 이 사태를 이런 의미로 해석하며 해결책을 서둘렀을 가능성이 많다.
"그냥 묵과할 수 없소. 여러 개의 국·공립학교를 한데 묶어서 확고하게 질서를 잡을 방법을 생각하시오"
오천석은 국대안을 자기가 발의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 내놓게 되기까지에는 미군정청의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대안으로 비롯된 교육계 파동은 좌·우익의 이념대결장이 된 학원가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몰고 오면서 고등교육계뿐 아니라 중학교까지도 동맹휴업에 합세하는 등 남한 전역이 태풍권에 휩쓸리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4-10 오전 1:00
ⓒ 한국대학신문(http://unn.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목록
프린트 스크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1

최신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