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6월 13일.
1년여에 걸친 국대안 파동의 불씨가 잦아들 무렵 서울대 새 이사회는 대학당국으로부터 그간의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국대안 기간 중 9개 대학 학생 8천40명 총 4천9백56명이 재적. 교수와 강사는 4백29명 중 3백80명이 교단을 떠나고 나머지가 1백40여명 …."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보고서였다. 학생이 반 이상 없어졌고 교수나 강사는 3분의 2가 사라진 셈이다.
더구나 이들은 스스로 나간 것이 아니라 재적이나 해직 처분을 당한 것이다.
이렇게 많은 학생이나 교·강사들이 쫓겨난 것은 그만큼 미군정당국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1947년 3·1절에는 기념행사 주도권 문제로 좌·우익 학생들이 충돌했다. 그러자 미군정청은 경찰을 동원, 좌익 학생 활동을 저지시켰다. 또 8월에는 좌익조직이던 조선교육자협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학원가에 침투한 남로당 중심의 좌익세력들을 색출, 붕괴시켜 나감으로써 대학가에 점차 국대안 반대 세력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국대안 기간 중에는 의외로 별난 사건도 있었다.
이 해 5월 1일에는 메이데이 행사가 열려 많은 중학생들까지 남산의 집회장소에 나갔다.
경찰은 이날 참가한 학생들을 연행, 조사하고 일단 모두 귀가시켰다. 그런데 학교당국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여학교의 경우 집회 참가를 이유로 경기여중에서 학생 3명을 퇴학시키고 4명을 무기정학 시킨 것을 비롯, 진명여중 3명 퇴학, 덕성여중 24명 정학, 배화여중 7명 정학 등 많은 여학생들이 처벌을 받았다.
이렇게 되자 학무국의 미국인 고문관 마틴 중위는 이들 학생에 대한 선처를 약속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리고 경기여중 강당에서 열린 서울시 남녀 중학교 교장 회의에서 학교당국의 처사를 비난했다. 메이데이 사건으로 퇴학당한 학생들은 "민주주의 교육정신에 입각하여 복교시켜야 한다"고 훈시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교장선생님들을 비롯한 학무국 당국과 미군 고문관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고 힘 겨루기가 계속되더니, 결국 마틴 중위가 고문관직에서 해임되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미군정 치하에서도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미군정청의 교육 목표는 한시 바삐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미국인은 한국에서 일본어와 신사(神社)가 사라지고 일본 왕의 교육 칙어 낭독이 사라졌지만 학교마다 여전히 아침 조회를 하고, 이승만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개탄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민주주의 교육이라면 메이데이 행사에 참가한 학생들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제압해 버릴 수는 없다. 사상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고 잘못이 있으면 내쫓기 전에 붙들고 가르치는 것이 민주주의 교육이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가 고문관직에서 해직되고 본국으로 송환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미국이 내건 교육목표와 함께 또 다른 중요 목표를 지니고 있었으며 마틴 중위는 표면에 내건 목표만 실천하다가 미국의 더 큰 목표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마틴 중위를 해직시키면서까지 학무국의 한국인 간부들과 학교 교장, 경찰의 편을 들어준 것은 이들의 태도가 그만큼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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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국대안과 관련해 미군정이 표방하던 교육정책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까?
이는 미군이 왜 한반도에 주둔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미국의 최대 과제는 분단국인 남한에서 공산침략 책동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그들의 이익을 추구했지만 그 중에서 최우선적인 목표는 군사적인 것이었으며 미군정청의 목표 역시 여기에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
마틴 중위가 주장한 민주주의 교육은 그것 자체로서는 좋은 것이었지만 메이데이 행사 참가자에 대한 그의 의견은 미국의 이 같은 기본 목표에 어긋나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 교육 목표와 군사 목표 중 하나를 선택할 입장이 되자 미국은 민주주의 교육을 버린 셈이다.
물론 미군정의 교육정책은 고등인력 양성을 통해 미개한 한국 민족 부흥의 기초를 닦아나가고 일제 군국주의 잔재를 청산하며,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것 등 긍정적인 목표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목표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국대안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국대안이 지닌 가치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국가권력이 대학 전체를 감독하고 운영해 나가는 방식은 막강한 재력과 일사불란한 조직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오천석의 생각처럼 일본의 도쿄제국대학 같은 일류대학을 만들어나갈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막강한 국가 권력이 지배하는 국립대학의 통제 수단은 좋든 나쁘든 기분 나쁜 교수나 학생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도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으며 좌익 또는 비판 세력을 색출할 기회도 잡을 수 있었으니, 미군정은 여기까지 고려했던 것이 아닐까?
중국의 모택동이 한때 백화쟁명(百花爭鳴)의 유화적인 수단으로 누구나 마음껏 떠들며 자기 사상을 노출시키게 만든 후 그들을 잡아버렸듯이 굴 속에 운신해 있는 짐승들을 잡으려면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노출시킬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천석은 뒷날 이런 말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국대안의 발상은 같은 국가의 재원으로 동일한 성질의 교육을 하는 기관이 2종 3종으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정 절약보다 더한 것은 교수요원의 부족이었다. …(중략)… 내 마음 속으로는 무능력하거나 좌경색의 교수를 축출해 내고자 했던 의도도 다분했다. 그러나 질이 낮다거나 좌경색이 짙은 교수를 축출한다는 의도는 당시로서는 입밖에 낼 수조차 없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국대안의 입안자였다는 오천석도 이처럼 국대안이 빨갱이 잡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유억겸 부장의 동의를 얻은 후 러치 군정장관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런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는 미군정청은 오천석의 의견에 따라가기만 한 것일까?
국대안은 이미 언급했듯이 한반도 진주 직후 미군정당국에 의해 기본 골격이 만들어졌으며, 그들의 계획에 있었던 이상 반대운동이 아무리 치열해도 결론은 뻔했다. 마치 북에서 누구도 소련에 이길 수 없듯 남한에서는 누구도 미국에 이길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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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의 미군정기는 우리에게 엄청난 과오를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 친일 세력에 대한 역사적 심판의 기회를 저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한 우리 민족의 손실과 고통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땅은 정의가 짓밟히고 불의가 판치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민주주의를 가르치려고 한 것도 좋았지만 친일세력을 비호하고 그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 줌으로써 정의의 심판이 소멸해 버린 세상을 만든 것은 그만큼 교육정책이 근본적으로 왜곡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과오가 반세기를 지나 앞으로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알 수 없게 되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미군이 처음 한반도에 상륙해서는 인천항, 부산항으로 헌옷 보따리와 밀가루를 실어오고, 달콤한 캔디도 한 깡통씩 집집마다 나눠주었다.
여기에 문교부는 교과서 용지도 주고 교사들을 파견해 민주주의와 죤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을 가르치고 학생들의 도미 유학도 도왔다. 국립 서울대학도 설립 동기와 과정이 어떻든 고등교육 발전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과 국가를 위해 바르게 쓰일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기본 목표라고 한다면 미군정 3년간의 교육은 미군이 서울에 처음 진주하고 아직 일장기가 마당에서 펄럭이고 있던 총독부 안에서 총독을 만나 일인 관리들이 모두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켜달라고 말했을 때부터 어긋나 버렸다.
친일 인사들을 불러들여 교육계 실세로 키워준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 민족의 간악한 반역자들에게 다시금 이중의 지배자가 되게 했다면 미국이 가르치려 한 민주주의나 우리가 내건 홍익인간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민(民)이 주(主)가 되는 것이다. 친일 반민족적 세력들이 여전히 지배세력이 된 세상을 만든 것은 민이 주가 아니라 종이 되는 것이므로 그런 체제에 우리를 길들여 나간 미군정 3년간의 교육은 근본적인 측면에서는 반교육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원리는 간단하다.
첫째, 미국은 한국 민족을 멸시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나 민족 자존심도 없이 노예적 존중 밖에 모르는 열등하고 미개한 식민지 백성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해방 후 일제 관리들이 미국인 곁에서 우리를 통치해 나가도록 부탁한 이유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둘째, 미국은 효율적인 행정 편의주의를 위해 일인 또는 친일분자들을 필요로 했다.
설사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심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전승국 또는 흑인이나 인디언을 지배해 온 백인의 오만으로 우리의 인격이 무시된 것이다.
셋째, 소련이 소련군 대위 김일성에 의해 그랬듯이 미국은 미국여자와 살다 온 이승만을 가장 친미적인 한국인 대표로 밀어줌으로써 그가 친미세력과 야합해 정권의 기반을 구축해 나가는데 일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은 오히려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넷째, 친일세력으로서의 행정관리, 경찰, 군대 출신들은 기술과 경험만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민족을 배반하고 힘 있는 자 편이 된 자들은 언제라도 새 주인에게 순종적이고 특히 죄 많은 자들의 경우 그들을 비호해 주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기 마련이다.
미군정 3년간의 최대 과오로 남아있는 친일 문제는 이 같은 것들이 주요 원인이 되어 우리 민족교육을 근원적으로 망쳐 놓았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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