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이 떠나면서 우리는 새 정부에 맞는 교육법 제정이 시급했다. 그러나 교육입국의 뼈대를 세우는 교육법 제정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1949년 12월 31일자로 시행된 대한민국의 교육법은 정부안이 국회에 이송되면서부터 비판이 일기 시작해 수정 법안이 통과된 후에도 줄곧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교육법 제정 50주년을 맞은 지난 해 교육법학회 주최의 학술대회에서 또다시 도마 위에 올려졌다. 논란의 배경은 우리나라 교육법이 일본식 법제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 주된 이유.
"아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1986년 어느 날 한국교육개발원에서 교육정책과 이념에 대한 연구과제를 수행하던 정진곤 교수(현 새교육공동체위원회 상임위원, 한양대 교육학)는 연구과정에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교육법을 구성하는 내용이나 표현방식이 어디에서 많이 본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947년 제정된 일본의 교육기본법과 1949년 제정된 한국교육기본법을 나란히 비교해 보았다고 한다. 그 결과 법률 제정 목적에서부터 교육 방침이나 학교 설립, 심지어는 부자연스런 용어 사용이나 표현 방법에 이르기까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
그런데 정교수의 지적은 상당부분 근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예를 들어 당시 두 나라 교육법 초안을 비교한 결과 법률 제정 목적에서는 '헌법 정신에 의거, '교육의 기본을 확립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등 어구나 표현이 동일했다. 교육 목적이나 교육 방침에 있어서도 '국민 육성' 이나 '교육 목적을 모든 기회 장소를 이용하여 실현한다'는 내용이 같았다. 교육기회의 균등 조항이나 의무 교육 조항에서는 기간만 차이가 날뿐 대동소이했으며 학교설립이나 종교 교육, 사회 교육 등에서는 성인교육 내용을 추가한 것 이외에는 내용에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국가감독권을 규정한 조항이나 교육 시설 이용 등 우리 법률 체계에서만 규정한 일부 조항을 제외하면 기본 뼈대는 일본의 그것과 유사했다. "해방된 지 50여년이 지났는데도 일본이 제정한 교육법을 그대로 배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는 사실 심한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정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건국 초기 문교부 관료로 법률 제정 과정 실무에 참여했던 심태진 대성학원 전 고문을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심씨 증언을 듣기 위해 본지 대학비사팀이 대성학원을 방문한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아 그분, 초기 교육법 제정 과정에 대해 많이 알고 계셨다는데 돌아 가신지 벌써 꽤 되셨어요." 그렇다면 건국 초기 교육법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제정되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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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문교부장관에는 안호상이 취임하였다. 그는 일본 영국 독일 등지에서 수학하고 서울대와 성균관대 등에서 교직 생활을 한 사람. 문교부에서는 모든 교육관계법을 제정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그 법의 명칭은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 사회교육법 등이었다.
그러나 당시 문교부의 법령 제정 능력은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법규 재정 경험이 풍부한 직원이 별로 없는데다가 미 군정기의 학제나 교육제도 운영도 법령이 아니라 거의 공문 통첩으로 운영해왔기 때문에 신생정부로서 참고할 선행법규나 법령 유산이 별로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
이들이 기껏 참고할만한 법령이래야 미군정기에 유산으로 남긴 [국립 서울대학 설립에 관한 법령], [교육구회의 설치], [공립학교 재정 정리] 등이었으나 일본은 교육 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이 47년 3월 31일 제정 공포되어 시행되고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신일본의 교육법령이 그들의 유일한 참고 법령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안호상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시 문교부 국·과장과 장학관 중 교육법 성안에 적극 참여한 인물은 손진태(문교부 편수국장), 홍정식(보통교육국장), 이호성(초등교육과장), 사공환(사범교육과장), 조재호(장학관), 심태진(장학관) 등 10여명. 조속히 법률 초안은 만들어야 했고 전문가들은 찾기 어려운 실정에서 이들이 법령을 배끼거나 모방하는 일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든 초안이 일본법을 기본으로 한 교육 3법안.
이렇게 정부로부터 만들어진 교육3 법안은 곧 국회로 이송돼 국회 교육관계상임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던 [문교사회위원회]의 심의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도 이같은 사정은 정계 일각의 반발을 불러왔다. 왜냐하면 교육법 심의 당시 전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박희병이 "정부안은 일본의 교육 3법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수정 의사를 강력히 보여 당시 반일적 민의를 수렴하기 위한 조치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특히 문사위는 정부안을 토대로 교육법 심의에 착수하돼 일각에서 일고 있는 비판론을 의식, 이재학 의원을 통해 별도의 교육법안을 성안할 것을 부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후 정부안과 이재학 의원 안은 교육법 성안 때 기초가 되었으며 제5회 국회 이영준 위원장과 전문위원 박희병, 정건영, 이선교 등이 이 두가지 안을 심도깊게 논의한 결과 교육 3법안을 하나의 단일 법안으로 묶는다는데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몇 차례의 토의 끝에 이들은 교육법에 담긴 내용은 대체적으로 수용하되 새로운 통합법안을 만든다는 원칙 하에 교육계에서 오천석, 장이도, 백낙준, 현상윤, 유진오 등 5인과 박희병 등 전문위원 5인으로 구성된 [10인 기초위원회]를 구성하게된다. 10인 기초위원회는 동년 7월 법안 기초 작업을 종료하고 교육계 인사들을 초청해 [20인위원회]를 조직, 9월부터 심의에 들어가 그 해 10월 26일 제5회 국회에 [대한민국 교육법안(11장 173조)]이라는 이름의 단일 교육법안을 상정했으며, 11월 30일 법률 제86호로 국회 본회의를 최종 통과함으로써 교육법안 기초 작업 종료 이후 6개월만에 작업을 마무리했다. 교육법은 그 해 12월 31일 일반에 시행됐다. 그리고 이 법안은 1997년 12월 13일 교육기본법과 초중등교육법, 고등교육법 등 3법으로 다시 분리, 시행되기까지 50여년간 우리나라 교육법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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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의 나라 교육법을 배껴썼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한 연구와 검토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다만 건국 초기 교육법을 성안한 인사들이 우리 고유의 사상과 가치를 배제했다고는 할 수 없을 지라도 미국과 일본이 남긴 유산을 지우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교육 목적이나 교육 방침을 비롯, 기본 학제를 6·3·3·4제로 제도화한 것이라든지, 초등교육을 의무화한 것. 교육 자주성 확립을 위한 '교육위원회 제도를 채택한 것 등은 조선교육심의회 또는 미군정청에 의해 심의, 공포된 내용으로 오늘날까지 교육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는 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주대 김경식교수(교육학)는 " 미국문화가 미군정기에 미군정책의 일환으로 시도되어 결국 교육법에서 제도적으로 정착됐다"며 "미국의 교육문화는 친미주도 세력의 정책에 반영되어 한국인의 손에 의해 헌법에 제도화되었고 동시에 미군정의 교육제도 문화도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주입되었다"고 말했다.
일본법 모방론은 특히 우리 교육법을 보는 학계의 곱지 않은 시각을 대변한다. 계명대 신현직교수(법학)는 "교육법 제정 당시 문교부의 교육3법안은 일본 교육3법의 형식과 내용을 모방한 것"이라며 "내용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1997년 제정된 교육법도 결국 일본의 법체계로 복귀한 것과 같은 의미" 라고 말했다.
건국 후 법률이 거의 일본 법령을 의용했다는 지적도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실제로 해방 이후 일본법을 의용한 사례는 형법이나 민법, 상법 등에서도 나타나 민법은 1958년 2월 22일 민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1960년 1월 1일 시행되기까지는 일본민법을 의용 민법으로 사용했으며 상법도 1962년 1월 20일 공포되어 1963년 1월 1일 시행되기까지 일본상법을 의용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법 가운데 제76조 "각급 학교의 장은 교육상 필요할 때에는 학생에게 징계, 또는 처분할 수 있다. 의무교육에서는 학생을 퇴학시킬 수 있다"는 등의 조항은 패전한 일본 교육법 제 11조 규정을 답습한 것으로 이는 일본교육 문화도 미군정청을 경유, 미군정 교육문화와 동행하였다는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의 시각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고려대 안기성 교수(교육학)는 "해방 후의 교육제도는 과거와의 단절 속에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1884년 근대교육법에 근거한 바가 크다"며 "근대교육법제의 내용을 계승한 우리 나름의 누적된 경험이 축적된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안교수는 특히 "건국 초기의 법제 유입은 일본 미국 유럽에서 쓰고 있는 평균적인 법 제도가 미군정의 영향 속에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며 "일본법도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강력히 통제 받고 이식되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교육법이 일본식 법제를 모방했다 하더라도 이는 미국 등 구미의 보편적인 법체계 영향 하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 나름의 누적된 경험 축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안교수의 지적은 당시 일본 교육법의 유사성을 부정한 의미라기 보다는 유사성에 대한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모방론을 부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정태수 전 대진대 총장도 이같은 모방론을 부정하면서 다만 참고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일본법을 음미한 후 이를 변용하거나 배척한 부분도 많다"며 "수업료 면제나 의무교육제의 부정, 남녀공학의 부정, 교육에 대한 국가 행정 권력의 강화 등이 모두 일본과 다른 것이며 달라질 필요가 없는 것은 그대로 수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교육법이 호전적 군국주의를 배제하도록 맥아더 사령부가 4대 교육지령을 내려 만들어진 것인데 반해 우리 교육법에는 그런 것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정태수 총장의 참고론은 적절한 지적이 될 수도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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