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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신흥 사학의 갈등-건국대와 단국대의 낙원동 교사 시절.
해방 후 낙원동 교사는 민립 대학 건설을 추진하던 신익희와 장형, 유석창 등이 모여 설립 의지를 다진 몇 안되는 교육 공간이었다.
그런데 국민대와 단국대, 건국대의 산실이 되는 이 공간이 오히려 현실에 어두운 미군정의 대학 설립 차등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사학 분쟁의 불씨가 되고, 급기야는 학생간에 난투극이 벌어지는 갈등의 공간이 된 것은 과연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3백여평 밖에 안되는 작은 건물 하나에서 미래의 거대한 종합대학이 셋씩이나 태어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작은 하나의 난자 속에 정자가 셋씩이나 들어가 복닥거리다가 아기가 만들어진 경우와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서로 몸싸움을 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세 대학이 함께 클 수는 없었으니까.

그럼 이들이 낙원동 교사에 모이게 된 배경은 어디에 있었을까.
해방이 되자 신익희가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에서 돌아와 낙원동 교사에 나타났다. 그는 임시정부의 법무장관, 문교부장, 외교부장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사람으로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이사장이 되고 국민대학 건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런데 참여한 이사 가운데는 후일 단국대를 설립하는 장형도 뜻을 함께 하고 있었다.
대학을 세우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장형은 대학 설립에 필요한 자금으로 막대한 토지를 희사하기로 한 조희재 여사와 인연이 깊었다. 조희재는 박기홍의 미망인이었으며 박기홍은 독립운동자금을 대주던 대지주였다. 그로부터 자금을 받아서 한만 국경선을 넘어 독립군에 전달하던 군자금 조달 총 책임자가 바로 장형이었다(이 부분에 대해 장형 선생의 아들인 단국대 장충식 이사장은 실제로 그 심부름을 맡은 사람은 어머니였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이 교사에는 그보다 먼저 유석창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석창 역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하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중국 땅에서 소년시절부터 그 나름대로의 애국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들은 다 같이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통점이 있으며 해방이 되자 이들이 낙원동 교사에서 반갑게 만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 ○ ○

낙원동 교사가 대학 산실로 자리잡게 된 것은 유석창의 노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그는 45년 10월에 사설강습소 건국의숙을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뛰어들어 46년 2월에 조선정치학관의 신청을 경기도에 제출하고 5월에는 학생을 받아 본격적인 낙원동 교사 시대를 열어 나갔다.
조선정치학관의 명칭은 그 후 정치학관으로 바뀌는데 이는 신생 한국의 정치다운 정치를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설립자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한편 46년 3월에 발족한 국민대학설립기성회는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범국민적인 민족대학 설립 의지를 표명해 임정의 주 요인을 비롯해 백낙준 이태규 조윤제 등 교육계 인사 40여명이 이사진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민족대학 설립을 경계하고 국대안 건립을 구체화하던 미군정청의 견제에 부딪쳐 난항을 거듭했다. 정규 대학이 아닌 [국민대학관]의 이름으로 그것도 그 해 12월에 가서야 인가된 것도 이 같은 이유와 무관하지 않았다.
특히 이 학교는 기성회 설립 당시 5만평의 토지 기부를 약속했던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재 여사와 이사진으로 참여한 장형 등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손을 때면서 재단을 구성할 교사 하나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국민대학관의 건학 운동이 사실상 신익희와 신민동지회가 주축이 되어 전개되면서 서로의 뜻이 맞지 않았다는 표면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초기 김구 노선을 따르던 신익희가 한민당에 입당해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면서 김구 노선을 지향하던 장형과는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형의 사랑방에서 서로 고성이 오가고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긴 것도 이때부터였다.
때문에 국민대학관은 1946년 9월 개교하고도 변변한 교사가 없어 종로구 내수동에 위치한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을 빌어 야간부 학생을 받았다. 조희제와 장형 등이 국민대학 기성회에서 갈라져 조선정치학관이 사용하던 낙원동 교사 일부를 빌어 단독으로 단국대학을 개교하게 된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조선정치학관은 아직 완전한 대학이 아니었다. 대학령에 의한 특종학교로 정규대학 학위를 수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문교부가 신교육제도 실시 이후 몰려들기 시작한 대학 설립 신청에 대해 일정한 기준을 정한 데서 비롯됐다.

46년 11월 미군정청 문교부가 발표한 대학 설립 기준에 따르면 3개 이상의 단과 대학을 종합한 규모의 대학을 [종합대학], 인문 혹은 자연과를 한 단위로 한 기관을 [대학], 주야를 불문해 입학 자격은 고등 중학 졸업 정도로 수업연한 2개년 이상의 교육을 시키는 기관을 [대학관], 1년 미만의 고등학술강습을 하는 기관을 [학관]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7년 6월부터 이 교사 일부를 빌려쓰던 단국대가 그 해 11월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 설립인가를 받아 간판을 걸게 되면서부터 두 대학간에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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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정치학관이 처음 학생을 받은 것은 1946년 5월 15일이었다. 당시 체제는 정치학과 20명, 경제학과 20명으로 각각 주·야간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인가가 난 것은 그 해 8월 29일.
초대 이사장에는 보성전문 출신의 강기덕이 취임하고 초대 관장에는 김정실이 임용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김정실이 단국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미묘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김정실은 국민대학관 설립 준비 과정에서부터 장형과는 사이가 깊었고 특히 기부 행위 문서 작성에 대한 일을 보고 있었던 사람이다.

당시 조선정치학관은 대학으로 인가되지 않은데다가 뚜렷한 자산이 없다는 이유가 약점이었으며, 여기에 명의이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반면 단국대는 47년 11월 1일 문교부로부터 정규 대학으로 인가되면서 조선정치학관에 나란히 단국대학 간판을 걸고 대대적인 학생 모집에 착수해 19∼20일에 입학검정시험을 치렀다. 11월 30일에는 사학자 장도빈이 초대 학장에 취입하고 12월 3일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12월 8일에는 낙원동 교사와 이화동의 배영학관 교사에서 정식 강의가 이루어졌다.
이 때부터 조선정치학관과 단국대 학생들 사이에서는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갔다.
그 동안에는 한 교사에서 조선정치학관과 단국대학이 나란히 간판을 걸고 수업을 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정규와 비정규에서 오는 차이로 학생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조선정치학관 학생이 단국대에 무료 편입하거나 입학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학생들 사이에서 소유주 유석창이 이 교사를 단국대에 희사하고 서로 합치자는 의견이 공공연히 제기됐다.

당시의 갈등 상황은 건국대 1회 졸업생 유덕산이 회고한 [건국대학교 흘러간 반세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단국대학으로 가자는 쪽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세어졌지만, 조선정치학관을 사수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힘이 있어야 상대방을 꺾을 수 있는 법인데, 우리 중에는 나서서 싸울 행동력 있는 사람이 고희상과 나밖에 없었다.
그는 힘도 세지만 100m를 12초에 달리는 우수한 육상선수이기도 했다. 한번은 고희상이 단국대학으로 가자는 학우 한 사람을 발로 차 혀를 2㎝나 떨어져 나가게 만든 것이다. 다친 그 학우는 단국대학으로도 가지 못하고 그만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그러나 무슨 일에건 그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결단력 있는 행동이 필요한 법이다. 우리는 더 이상 사건이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을 관망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9월 말의 어느 날, 이 모든 일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로 고희상과 나는 각목을 손에 쥐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단국대학으로 가자고 선동하는 학우들을 향해서 각목을 휘둘러 가며 닥치는 대로 때리고 싸웠다.
머리가 터져 피가 흐르는 사람도 있었고, 이가 부러져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 것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 날 1백여명의 장정들이 싸우는 통에 책상이며 의자며 온갖 기물들이 산산조각이 되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나가보니, 2백여명이나 되는 학우들이 운동장에 모여 단국대학으로 가자고 외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수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조선정치학관에 남자는 학우들은 불과 15명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고희상과 나 뿐이었고 다른 학우들은 아예 교내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낙원동 골목길에서 서성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대학 진학을 놓고 1년여를 끌어온 학생들의 갈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유덕산, 고희상 등 조선정치학관 사수파로 분류된 학생 간부들이 나창남 이해일 등으로 분류된 단국대파 학생들로부터 요리집에서 대학을 바꾸는 조건으로 20만환을 받는 뇌물 수수 시비가 일어나면서 더욱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4천환하던 시절이었던 점에 비춰본다면 이들의 뇌물 공여는 결코 적지 않은 액수였다.

그리고 학원을 둘러싼 이들의 대립은 극한 투쟁을 낳으며 급기야 칼부림이 난무하는 무법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단국대파 학생들의 습격에 대비해 유석창의 가회동 자택에는 사수파로 분류된 학생들이 경비를 서는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시대 거부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제 여사와 그의 딸 박정숙이 희사한 토지 80만평을 기초로 설립된 단국대학은 비교적 빠른 시기에 신흥대학으로 탄생하였으나 이처럼 교사 사용 문제로 초기부터 조선정치학관과 큰 갈등을 겪었다.

두 대학의 갈등은 조선정치학관이 1949년 9월 9일 정치대학으로 설립, 인가되고, 단국대학이 그 해 12월 조선전기주식회사(현 한전)가 관사로 사용하던 신당동의 조선전업협화장 건물 7백평을 인수, 이사하면서 비로소 막을 내렸다.
그런데 교사 사용을 놓고 갈등을 겪었던 것은 비단 건국대와 단국대만이 아니었다.
설립기성회를 발족해 비교적 빠른 시기에 대학관을 세운 국민대학도 초기에는 교사 확보 문제로 갖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국민대학과 지금의 경남대학(해인대학)이 분화되었다. 그들 역시 해방 후 신흥 사학들이 겪어온 고질적인 교사 확보 문제가 갈등의 시작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8-21 오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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