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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전직 대통령의 못다 이룬 총장 꿈(1) 노태우와 단국대
해방 후 50여년을 이어온 이 땅의 고등 교육은 수많은 선각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특히 대학이 갖는 상징성은 저마다 기반을 달리해 온 전직 대통령들에게 있어서도 주목을 받는 대상이었다.

권위에 도전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최고 권력자에게 있어서 대학은 통치철학을 기초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었으며,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각 방면에서 뽑아 쓸 수 있는 공장이기도 했다. 특히 대학은 그들에게 있어서 퇴임 후 거취로까지 연결돼 명예와 존경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는 적절한 안식처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많은 대학의 책임자와 교수들이 학교를 설립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권력기관에 손짓하며 부와 권세를 나누고자 했던 소망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이 땅의 최고 권력자들이 퇴임 후 저마다 대학 총장이나 이사장으로 여생을 편히 보내고자 했다면 바로 이런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제를 거쳐 해방 후 민족 지도자로 이름을 날리던 김구와 이승만의 주변에는 대학 설립을 염원하던 교육 주체들이 늘 함께 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해방 후 건국실천양성소를 비롯해 국민대 단국대 홍익대로 이어지는 신흥사학의 설립 과정에서 고문이나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상징적인 고문이나 회장 외에도 특정 대학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교내에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인천시에 하와이 교포 이주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인하공과대학(인하대 전신)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발의에 따라 이루어진 대학이었다.

인하공과대학은 1954년 4월 인천시 소유 부지 12만5천여평과 국고 보조 1백만불, 그리고 당시 하와이 교포 2세의 교육을 위해 이승만이 설립 운영하던 [한인기독학원(Korea Christian Institute)]을 처분한 대금과 교포들의 성금이 모여 탄생했기 때문이다.
대구대학(현재의 대구대학과는 다름)과 청구대학이 합쳐진 영남대학의 경우 박정희가 임기 후 고향에서 총장이나 이사장으로 여생을 마치겠다는 의지가 탄생의 배경이 됐다.

1956년 대구 서문교회의 이영식 목사가 세운 [한국사회사업대학]을 뿌리로 출발한 대구대학은 교내에 일명 이순자 기념관(시청각 교육원)으로 불리는 건물이 있을 만큼 80년대 들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이는 당시 전 대통령과는 대구공업고등학교 동기동창이던 권오택교수(영문학)가 대구대학에 재직하면서 5공화국 정권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핵심 축을 형성한 것과도 무관치 않았으며, 이 지역에서는 퇴임 후 전 대통령이 내려와 학교 운영의 실권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그간 말로만 무성하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단국대 총장 추대설은 본지 대학비사팀의 취재 결과 퇴임 1년 후로 예정된 일이었으며, 실제 이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오고 갔던 것으로 확인됐다. 장충식 이사장(현 한적 총재)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같은 계획은 그간 장 이사장이 침묵을 지켜 소문으로만 나돌았으나 최근 본지와의 대담에서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처럼 전직 대통령들의 대학 총장 꿈은 재임 시절의 파행과 현대 정치사의 굴곡 속에서 사실상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부정선거와 자유당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물러나 끝내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체 여생을 마쳤으며, 군사정권의 전형을 남긴 박정희는 철권의 유신 독재 와중에 수하의 손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자신이 그리던 대학 교정에 더 이상 설 수 없었다.
신군부 쿠데타로 명성을 날린 5공화국의 전두환은 퇴임 후 정치 역학 관계 속에서 대학보다는 백담사 행을 택해야 했으며, 6공화국의 노태우 역시 단국대 재단의 경영악화와 비자금 연루로 평범한 총장으로서의 꿈을 접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들의 꿈이 무산되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대학을 운영하는 주체들에게 있어 그들의 도움이 그만큼 절실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정은 곧바로 대학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해당 대학 발전 구상의 밑그림이 되기도 했다.
특히 단국대와 영남대는 대학이 최대의 위기를 맞았을 때 삼성이라는 재벌 재단과 권력의 최고 지도자를 맞아들이려 한 공통점이 있어서 흥미롭다.

그럼 이제 전직 대통령의 흔적이 아직 베어있는 단국대와 영남대를 중심으로 구성원들이 어떻게 전직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갔으며 성장 과정을 겪었는지 살펴보자.

○ ○ ○ ○

낙원동 교사에서 신당동으로 이전한 단국대학이 한남동 부지 4만여평에 터전을 마련하고 신교사를 세운 것은 개교한 지 10년 만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1967년의 일이었다.
그 후 단국대학은 천안에 제 2캠퍼스를 건립하는 등 종합대학에 걸맞는 체제와 규모를 키워 나가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특히 1988년에는 천안에 국제 규모의 학술회의장을 건립했으며 91년에는 이 대학의 숙원사업이던 부속 병원을 완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국대는 이 과정에서 자금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노태우 대통령을 극비리에 총장으로 영입하려던 것도 이같은 상황과 전혀 무관치는 않았다. 이 시기는 특히 의대 신설을 계기로 삼성이 재단으로 돌어올 의사를 강력히 피력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발전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데 구성원의 관심이 쏠렸다. 장충식 이사장(당시 총장)이 노태우 대통령을 비밀 접촉한 것은 6공화국이 말기로 접어들던 92년 10월경부터였다. 정국이 차기 대권 후보들의 선거 활동으로 점차 달아오르던 시기였다.
장씨는 먼저 노 전 대통령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당시 부정입학 대학의 총장들을 잇따라 구속시킨 데 대한 섭섭함을 담고 있었지만 퇴임 후 단국대 총장으로 와줄 것을 권유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장 이사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6공화국은 역대 정권 가운데 대학 총장들을 가장 많이 괴롭히고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나는 노대통령에게 선거철의 정치논리로 국민들의 비난의 화살을 대학에 쏠리게 하는데 대해 섭섭함을 피력했어요. 그리고 사학이 얼마나 어려운지, 학생들이 왜 데모하고 교수들은 왜 저항하는지 직접 와서 총장을 해 보라고 권유하기에 이르렀어요

즉각적인 반응이 없자 장 이사장은 선이 닿는 인맥들을 동원, 문제를 풀어나갔다. 장씨의 노력에 측면에서 지원을 벌였던 사람은 당시 청와대 대변이었던 김학준 현 인천대총장과 김중권 정무수석비서관 등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김 총장은 청와대 대변인 직후인 93년부터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94년엔 이 대학의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88년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김중권 비서관이 93년 3월 단국대 대학원 초빙교수로 재직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그런데 장씨의 노 전 대통령 영입 배경에는 노 전 대통령과의 오랜 친분도 한 원인이었다. 장씨는 80년대 초 노 전 대통령이 보안사령관을 지내던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5공 정부에서 체육부장관을 지낼 때 서울올림픽조직위원과 새마을체육회장 등을 맡으면서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그 뒤 두 사람은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오른 이후 사석에서도 만나 서로 흉금을 터놓고 애기할 정도로 친밀해졌다.

노 대통령이 임기만료를 앞둔 이 무렵 일본을 방문해 외신기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퇴임 후 거취를 묻는 질문에“대학에 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다시 장 이사장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 제의에 대해 노대통령은 긍정적인 의사를 보였어요, 그러나 퇴임 직후에는 어렵고 1년 후쯤 오겠다고 말했어요. 나는 당시 삼성이 재단으로 영입될 예정이며 노대통령이 총장에 취임하게 되면 단국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육성시킬 자신이 있다고 피력하기도 했어요 장씨의 말처럼 이 무렵 삼성이 단국대의 재산 현황을 살펴보고 잠재적인 발전 가능성이 있다며 재단 참여의사를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삼성 역시 삼성병원의 뒤를 받쳐줄 수 있는 의대가 필요했고 단국대는 의대 신설에 이어 천안에 부속 병원을 신축한 상태였다. 장씨의 이러한 의도는 대구 출신의 엄삼탁 전 병무청장이 이건희 삼성회장과 다리를 놓음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삼성을 재단으로 영입하려고 할 때 나는 선친의 유지를 받드는 차원에서 학교 이름은 바꾸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공대에 3천억원만 투자하면 의대는 내가 1천4백억원을 투자해 세계적인 대학으로 육성하겠다고 했어요. 그런 후에 나는 그저 대학에서 물러나 삼성문화재단에서 문화사업을 하는 한 일원쯤으로 남겠다고 했어요. 이것이 실현되었다면 아마 지하에 계신 선친도 잘 했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 같은 계획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몇 가지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우선 표면적으로는 교육부가 김영삼 정부 출범 초인 지난 93년 단국대의 부실운영 및 입시관련 서류의 고의폐기 책임을 물어 당시 총장이던 장 이사장의 해임을 재단측에 요구했던 것. 당시 교육부는 단국대가 천안캠퍼스와 부속병원 등 학교 시설을 무리하게 확충하고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해 1천7백여억원이 넘는 빚에 시달려 왔다고 밝혔다.
실제로 교육부는 단국대의 입시부정을 파헤치기 위해 감사에 들어갔으나 단국대가 91∼93년의 모든 입시관련 서류를 소각해 확인하지 못했다며 이의 책임을 물어 당시 학교 재단에 장 총장의 해임을 지시하고 관선이사를 파견했었다.
그런데 이 같은 배경을 놓고 장씨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단국대에 부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같은 일이 벌어진 주 원인은 김영삼 정부의 보복성 정책 때문이었다는 것.

선거가 한창이던 어느 날 김영삼 후보 진영에서 한 측근 인사가 날 찾아왔어요. 그는 먼저 김영삼 후보를 만나볼 것을 권유하는 한편 여러 가지 어려움을 들어 선거 자금을 부탁했어요. 나는 이 시기에 김 후보를 만나는 것도 적절치 않고 선거자금도 대줄 형편이 못된다고 거절했어요. 이때부터 YS의 보복이 시작돼 문민정부 들어 단 한 건의 민원도 해결되지 않았어요. 금융권을 통한 대출의 길도 막히기 시작했어요.
장씨에 따르면 교육부 감사도 이 때문에 이루어졌고 삼성 재단의 영입도 청와대의 압력을 받은 삼성측이 어느 날 삼성생명의 한 측근을 보내 없던 일로 해 달라고 요청해 와 결국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YS의 탄압설은 지금 측근들의 함구로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어쨌든 이 과정에서 삼성의 재단 참여 계획은 백지화되었으며, 단국대학의 경영은 점차 어려워져 그 후 대학 초유의 부도 사태를 맞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학내 문제가 시끄러워지고 비자금 도피설 등이 대학가에 끊임없이 나돌면서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장 이사장의 총장 제의를 없었던 일로 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9-18 오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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