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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전직 대통령의 못다 이룬 총장 꿈(2) : 박정희와 영남대
박정희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의 안식처로서 대학을 생각했다. 최고 권력을 휘두르던 그가 그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대학 이상 적당한 자리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에는 명예도 따른다. 그러나 권력도 권력 나름이다. 명예는 협박과 공갈에 의해서 강요된 허깨비 명예에 불과하다. 특히 4·19 혁명으로 얻은 민주정부를 총검으로 약탈한 군사독재자에게 있어서는 그가 집권 후에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역사의 발전을 거스른 반민주적 약탈자의 원조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명예를 찾는 길은 우선 그 권좌에서 물러나는 일이며 그 후 인재양성에 힘쓰며 좋은 대학이나 운영해 나간다면 그곳이 안식처도 되고 또 명예도 돌아올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의 재임 중에 영남대학이 만들어지고 그 후 맏딸 박근혜가 재단이사장이 되기까지는 박정희의 이 같은 퇴임 후 계획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남대학은 박정희가 국가 최고 통수권자로서 하루 아침에 만들어낸 신생대학이 아니었다.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합병시켜서 영남대학이 된 것이다. 이미 임자가 있던 두 대학이 박정희에게 넘어간 것이다.

◆1967년 12월 통합시의 대구대학 대명동 교사전경(왼쪽)과 대구대학 대명동 교사전경.

그렇다면 원래 주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구대학의 설립기성회 회장이던 최준은 8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가문에서는 박정희의 약탈에 대한 원분을 완전히 삭여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누가 그 대학의 주인이 되든 외국에 빼앗기지 않고 이 나라에서 인재를 키워주는 대학으로 남아있게 된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함께 주인이 떠나고 박정희의 영남대학이 된 청구대학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달랐다.

○ ○ ○ ○

5·16 후에 청구대학은 재기불능의 재정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최해태 학장과 심재완 도서관장 등을 중심으로 한 경영진이 다른 교수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대구대학도 재정이 어려워지니까 삼성을 끌어들였어요. 거대 재벌을 만나서 발전의 기틀을 다지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방법을 찾아야 하지요. 재단이 변변치 못하면 권력이라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

여기서 권력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면서 이들은 다 같이 박정희를 생각했다. 최고 권력자 박정희가 바로 대구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국가 최고의 권력자를 맞이해 들이는 작업이 시작되고 그 로비를 맡은 적임자로서 이은상이 등장한 것이다.
이은상이라면 박정희가 모를 리 없었다. '가고파'의 시인을 모를 사람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가 바로 청구대학의 국문과 교수였다.
중대한 사명을 맡은 이은상은 그로부터 한달 후 청구대 학장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며칠전 광주에서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을 만났어요. 취지를 잘 설명하고 대통령과의 면담을 부탁했는데 일이 잘 될 것 같습니다. "
그 후 다시 한달이 지난 후 마침내 이은상은 청와대에서 박정희를 만나 심각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대구는 각하의 고향입니다. 그동안 각하는 무관으로 대통령을 했으니 문관으로도 이름이 남아야 할 것 아닙니까? "
"그게 무슨 소리요?"
박정희는 짐짓 사전 지식이 별로 없었던 듯 이은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통령은 백년 동안 할 수 없는데 그만두면 빗자루 들고 돌아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회사 사장이 될 수도 없고, 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물러나 대학 총장을 했는데 각하가 못할게 뭡니까? 또 그만큼 떳떳한 일도 없을 듯 합니다. 마침 대구에 있는 청구대학이 재정부담에 시달리고 있고 구성원들도 이를 원하고 있는 터이니 이 참에 대학도 하나 구하고 여생을 편안히 보내시지요."
안 그래도 박정희는 변화무쌍한 현실 정치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던 차에 퇴직 후를 염두에 둔 이은상의 제의가 솔깃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날 이은상과 박정희의 대담은 두시간 반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박정희는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내가 한번 맡아보지."
이렇게 해서 청구대학은 박정희와 실질적인 관련을 맺기 시작했다.
박정희 자신이 재단 이사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청구대학의 이사진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이후락을 비롯, 이효상 전 국회의장, 백남억 전 공화당 의장과 이동령(문경시맨트), 김성곤(쌍용) 등 그의 뜻을 받든 공화당 중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청구대학의 실질적인 교주로 추대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청구대학은 박정희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청원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처럼 대학이 재정적으로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서 구명을 호소하게 된 원인제공자가 박정희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대학정비에 착수하면서부터 사학들은 정원이 줄고 이 때문에 재정난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연세대같은 경우 80여명의 강사부터 목을 잘랐다. 이화여대, 성균관대, 고려대, 단국대, 국민대 등 거의 모든 사학들도 예외없이 허덕이게 될 때 처음부터 재정기반이 약한데다 야간대학에 불과했던 청구대학으로서는 그 같은 문교정책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청구대학이 백기를 들고 박정희에게 구명을 호소한 원인은 바로 박정희에게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 ○ ○ ○

청구대학은 독립촉성경북청년총동맹의 최해청 위원장이 장인환 대구시보사장의 도움을 얻어 무산 근로 계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중대학강좌'가 모태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최해청은 경술국치 후 망국의 한으로 청도군수직을 박차고 평생 두문불출했던 지사 최현달의 들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대구와 일본 등지에서 항일, 반전 활동을 주도했던 지식 계층이었다.

그는 1947년 11월 대구시보사의 독립운동국장에 취임한 이래 배움의 길을 찾는 근로 청소년들을 위한 대학 강좌를 계획하다가 48년 1월 15일 '제1차 대중대학강좌'를 3주 코스로 실시했다. 그런데 뜻밖에 이 강좌는 근로 청소년 5백여명이 모여들면서 성황리에 끝났고, 여기에 고무된 주최측이 추가 개설한 강좌도 근로 학도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횟수를 거듭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마지막 강좌가 끝난 5월 30일 대구 금호강변에 모인 학생과 지사들의 자발적 발의로 '대구야간대학기성회'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날 결성된 기성회에서는 회장에 장인환 경상북도지사가 추대되고 최해청, 안태섭이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지역 유지 20여명이 가세하면서 힘을 얻어, 그 해 11월에는 [대구문리과전문학원]의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이같은 호응이 사회적 관심을 얻게 되면서 대구문리과전문학원에는 참여를 희망하는 유지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1949년 8월 경북포화조합 이사들이 재산을 기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재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1950년 4월 25일에는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받은 재단으로 거듭나 초대 이사장에 정종수, 학장에 최해청이 취임, 대학의 모습을 갖춰갔다.

그런데 대구대학은 청구대학과는 사정이 좀 달랐다.
대구에는 박정희가 나온 대구사범이 있었다. 공부는 잘하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이 간 사립학교다. 여기에 해방이 되자 처음으로 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났다. 45년 10월 20일 경북교육협회장 이규원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 30여명이 대구시 북성로에 있던 경북산업주식회사 2층에서 대학설립준비워원회 구성을 결의한 것이다. 설립준비위원회는 그 후 몇 차례의 모임을 갖고 경북 도내 각계 유지와 기관장이 참여한 가운데 경북종합대학기성회를 발족하고 회장에 최준, 부회장에 이규원, 사무위원에 조용기를 선출하는 등 본격적인 모금 운동에 착수했다.

그런데 본사 취재팀의 확인 결과 설립 초기의 성격과 모금 과정에 다소 증언이 엇갈렸다. 대구에서 해방 직후부터 대학설립과정과 성장과정을 지켜봤던 한 원로교수와 대구대 설립 당사자인 최준의 가문에서 증언한 내용에 중대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퇴직한 이 원로 교수 증언에 의하면 설립과정에서 많은 재산들을 기탁한 사람들은 주로 일제시대에 부일 경력 등이 있던 지주계급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재산기탁이 있기 전 초기 모금 활동은 해체를 고려할만큼 순탄치 않았지만 각 군수들의 협조와 도지사, 고등법원장 등 대구 지방 기관장들의 연명을 받아 부호들을 차례로 설득한 끝에 거액의 토지 1백여만평과 현금 출자를 받으면서 힘을 얻었다는 것. 그의 증언에 오른 사람 가운데 한 인물이 경주 갑부 최준이다. 그리고 전답 24만여평과 현금 8백60만원을 희사한 대구의 정해붕을 비롯 이상렬(전답48만5천여평), 이상호(전답 19만여평), 추병화(전답 4만2천평), 안주홍(임야 5만4천평), 김석주(임야 1백29정), 이유득(임야 1천여평) 등도 다액 기부자로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설립자 최준 가문의 주장은 이와는 다르다. 일제 때 부일 활동으로 부자가 되었다가 해방이 되자 속죄의 뜻으로 재산을 기탁했다는 데 대해 그들은 격분을 금치 못했다. 독립유공자를 친일파로 몰아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 많은 재산을 내놓은 애국적 동기를 과거의 죄과에 대한 속죄로 여기다니 억울하고 분해서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준의 한 손자가 제시한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이에 대한 반증 자료다.

{ … 최 준(崔 浚) : 1884. 7. 27 ∼ 1970. 10. 13. 경북 경주사람이다. 그는 경주지방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과는 사촌 처남의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맡기도 했다.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이에 연루되어 피체되기도 했던 그는 3·1 운동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역시 거액의 자금을 송달하였다. 한편 그는 1921년 9월 태평양회의에 보내기로 한 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국가보훈처에의 기록 내용에 의하면 대구대 설립자 최준은 조국 광복에 크게 기여한 공로자였으며, 당시 설립기성회장으로서 현금 40만원과 장서 5천5백권을 기증하고 재단법인 인가 신청을 내 1947년 9월 22일 문교부 인가를 받은 설립자였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9-25 오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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