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박정희 흉상 철거와 홍익대 설립 논란
11월 5일 정오.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의 문래공원에서는 역사의 한 단면을 되돌아보는 사건이 벌어졌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민주노동당. 서총련. 인터넷 대자보. 홍익대 민주동문회 등 5개 단체 소속 회원 등 30여명은 이날 문래공원에 세워진 박정희 소장의 흉상 목 부분에 일장기를 두르고, 세 개의 줄을 맨 후 일시에 끌어당겼다. 박정희 흉상은 3분만에 힘없이 나뒹굴며 땅바닥에 내동냉이 쳐졌고 참가한 시민들은 이 모습을 지켜보며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이날 `우리는 왜 박정희 흉상을 철거하는가'라는 성명을 통해 "우리가 오늘 박정희 흉상을 철거하는 것은 박정희가 기념의 대상이 아닌 청산과 극복의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홍익대 민주동문회 이름의 성명도 "오늘 정오에 양심과 정의의 심판을 내려 모교가 기증한 박정희 흉상을 철거한다'"며 "여기 부끄러운 홍익의 역사가 있으니 삼가 옷깃을 여미며 앞날의 뼈아픈 교훈으로 삼으리라!"는 말로 거사(?)를 자축했다.
이날 철거된 박정희 흉상은 '홍익대 근정'이라는 동판이 제거된 채 이 학교 교정으로 옮겨졌으며 민주화 투쟁 순국 기념비 앞에서 묵념을 올린 후 민주동문회에 인계되었다.
그러나 이 행사를 두고 정치권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 시각을 보였다.
민주당은 이날 성명을 내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검증과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며 "전직 대통령 흉상을 철거한 것은 적절치 못한 행동으로 사직당국은 이에 대해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한나라당도 논평을 내고 "박 전 대통령의 역사적 공과에는 입장차와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국민과 역사가 평가토록 해야할 것"이라며 "정부는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이번 사건을 엄정하게 다루기 바란다"고 말했다
자민련은 특히 이날 오후 고위 당직자 회의를 열어 이번 사건을 보수세력의 상징을 쓰러뜨린 반통일세력의 만행으로 규정하고 보수세력의 결집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 범국민기구'(가칭) 결성에 나서기로 했다.
한편 이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6일 곽태영 4월혁명회장을 강도상해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은 이에앞서 곽 회장 등 3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신청, 신병 확보에 나서는 한편 철거된 흉상을 되찾아오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홍익대 총학생회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 받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7일 오전 11시.
낙엽이 흣날리는 늦가을 홍익대 학생회관 계단 앞에서는 이미 체포영장이 발부된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용삼, 방학진씨가 시민단체회원과 학생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있었다. 이들은 경찰이 주장하는 공공기물 파손 죄에 대해 "훗날 우리 후손들이 역사의 죄악이 자행될 때 우리는 무엇하고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공공기물을 보존하기 위해 침묵하고 있었다고 말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박정희 흉상 철거는 역사의 기만행위를 막고 바로 잡기 위한 역사투쟁"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희 흉상은 기자회견 후 곧바로 이 학교 민주동문회에 의해 총장실로 옮겨졌고. 가벼운 실랑이 끝에 장병기 총장과의 간단한 상견례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는 이날 박정희 흉상을 철거한 사람들을 강도상해죄로 구속하려는 경찰에 분노하며 "4·19 혁명의 싹을 군사 쿠데타로 압살하고 18년 철권 통치로 사회를 공포로 몰고 간 박정희야말로 강도상해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새삼 34년전 일이 오늘에 와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와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1차로 현 정권이 국민적 합의와 역사적 청산 없이 다분히 정략적 차원에서 기념관 건립을 서두른 탓도 있지만 그보다 해방 후 국내 사학이 성장하는데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권력과의 유착과 동조화 현상에서 찾아야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그럼 과연 동문들까지 나서 청산하고 싶은 과거사로 거론하는 홍익대 설립 역사의 숨겨진 진실은 어떤 것이었는지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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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공원의 박정희 흉상은 1966년 홍익대 최기원교수(조소)가 제작한 조형물로서 '홍익대 근정'이라는 문구가 붙어있어 홍익대가 공식적으로 살아있는 독재자에게 흉상을 기증한 꼴이 되어왔다. 다만 사건이 불거지면서 최근 조형물을 제작한 최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5 16 쿠데타의 발상지이자 지휘부 역할을 했던 6관부사령부의 의뢰로 흉상을 제작했다고 밝혀 자발적 기증설을 부인하고 있는 실정.
1949년 6월 신흥대학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문교부 설립인가로 4년제 정규대학이 된 홍익대는 한 때 [홍익미술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할만큼 미술학부만 존재하는 소규모 대학이기도 했으나 현재 9개 단과대학과 12개 대학원에 1만7천여명의 재학생을 자랑하는 거대 사학으로 성장해 왔다.
그런데 우리가 이 대학의 탄생 유래를 박정희 흉상 철거와 관련지으려는 것은 최근 이 대학의 설립사를 놓고 구성원간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왔으며 심지어는 의견을 달리하는 주체간 싸움이 법정 소송으로까지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홍익대 총대의원회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설립 정신 왜곡 논란은 올 들어 이 학교 총학생회가 학교와 재단측에 잇따라 재론하면서 문제가 불거졌으며, 민족·독립유공자단체와 일부 동문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민족홍대 바로세우기 운동본부'(본부장 김삼열 독립유공자 유족회장)가 최근 인터넷 공간에 '홍익사랑' 홍페이지를 만들면서 급속도로 확대되어 왔다.
설립사나 설립 정신이 왜곡됐다는 주장의 핵심은 우선 독립운동가 이흥수씨가 사재를 털어 만든 홍익대학이 친일 성향이며 5·16 군부 세력에 동조하던 이도영씨 일가에게 넘어가면서 건학 초기의 이념과 정신이 훼손됐다는 지적에서 비롯된다. 특히 이도영씨를 비호하는 현 재단이 설립 정신을 고의로 은폐하거나 축소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체성 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시각이 논쟁의 핵심거리.
박정희 흉상을 기증하게 된 것도 당시 이도영씨가 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1966년의 일로 자신의 충성심과 군부 세력을 비호하던 권력 지향의 속성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건학 정신을 왜곡한 부끄러운 과거사라는 지적이다.
이들의 지적처럼 홍익대가 올해 발간한 요람이나 공식 문건, 인터넷 홈페이지 연혁란 등에는 대학 설립을 둘러싸고 전개된 이흥수씨의 설립 기부 행위나 활동상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고, 상대적으로 56년 이후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도영씨와 관련된 활동 사항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개교 초기 발간한 요람이나 문건에는 이흥수씨를 설립자로 하는 대종교 재단이 중심이 되어 홍익학원과 홍익대학관 설립인가를 받은 것으로 표기되어 있어 언제부터 이 부분이 빠졌는지 의혹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재단과 학교 관계자들은 문서 작성 과정에서 나온 단순한 실수로서 은폐하거나 왜곡할 의도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설립자나 설립 정신은 후대에 와서 임의로 바꾸거나 윤색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학교측이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이들 양측의 주장이 사이버 공간으로 확대되면서 사실상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어 사정을 잘 모르는 현재의 대학 구성원들은 그저 의아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의 홍익대는 누가 어떤 생각으로 만들어, 운영했던 것일까?
지금부터 학교측과 재단, 관련 단체들의 증언을 종합해 문제가 된 설립 초기의 상황과 이를 둘러싼 논란의 배경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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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가 다른 대학과 달리 설립 정신이나 정체성을 놓고 논란을 벌이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창학기부터 도약기에 이르기까지 출신 성향이 서로 다른 이사장이 대학을 운영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홍익대학 홈페이지의 연혁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 본교는 1946년 4월 1일 재단법인 홍문대학관을 설립하고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31번지 소재 흥국사에서 개교하여 동년 9월 22일에는 문과 및 법과 1백31명의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1948년 8월 10일에 재단법인 홍익학원과 홍익대학관으로 개편인가를 받으면서 부속 전문부를 설치하고 12월 20일에는 교사를 용산구 문배동 24의 8로 이전하였다. 1949년 6월 27일에 법학부, 문학부, 초급 대학부의 4년제 홍익대학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교세확충을 위해 10월에는 인천시 만석동에 분교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 (중략) 1956년에는 문헌 이도영 이사장이 취임하면서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발판을 굳히고자 교사 신축을 확대하고 내실화에도 역점을 두었다. … (하략) "
그런데 이렇게 서술된 짧은 연혁에서부터 구성원간 시각차가 첨예하게 엇갈린다. 여기에는 1946년 설립된 [홍문대학관]을 홍익대학의 모체로 볼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도 포함된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다른 대학이 비록 소수의 학생을 교육하더라도 창학정신이나 설립 정신만은 후대에 전승된 반면 홍익대학의 경우 그렇지 못한 실정. 이는 [홍문대학관] 설립자 양대연 이사장과 [홍익대학]의 설립자 이흥수 이사장, 그리고 56년 경영상 이유로 취임했다는 이도영 이사장이 서로 다른 성향과 배경을 가진 까닭에 학교를 운영하는 기본 방식이나 교육 목표가 달랐던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46년 4월 [홍문대학관]이란 교명으로 미군정청의 김태선 서울시장에게 학원 설립인가를 받은 양대연씨는 한 회고에서 학교명을 홍문대학관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 왕조 세종∼성종년간에 양성지는 자신의 14대 선조로 이조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세종 때 설치했던 집현전을 세조 때 왕위찬탈을 반대한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폐지한 뒤 예문관에 예속시켰는데, 성종 때 양성지 등이 건의하여 홍문관으로 개칭하면서 독립된 집현전의 후신으로 발족하게 하여 인재 양성 및 학문적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조상의 학문적 깊은 뜻과 선조의 얼을 기린다는 취지에서 홍문대학관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양씨가 홍문대학관을 설립한 취지는 이처럼 조선 왕조 때 홍문관의 옛 전통을 이어받으려는 유교적 전승 의지가 짙게 깔려 있었으며 이를 통한 고등교육 인력 양성을 교육의 우선 목표로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양씨의 이같은 생각은 1년을 가지 못하고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이는 그 해 9월 학생을 받기는 했지만 학교 운영 자금은 물론 당장 학생들을 수용할 교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무엇보다 이때 홍문대학관은 정식 학부가 아닌 사설 학원에 불과해 재학생들의 반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당시 학생들은 △재단을 확립해 법인으로 정식 대학 인가를 받을 것, △적당한 교사를 조속히 확보할 것, △교수진을 강화할 것 등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양이사장은 창학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진 사퇴하게 되고 교수와 직원, 학생들로 구성된 [관무집행위원회]의 요청을 받아들인 대종교계의 이흥수씨가 강원도 홍천과 양평 등지의 임야와 전답 1백17만평과 현금을 출연해 새로운 재단 이사장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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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홍익대학을 설립한 이흥수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민족단체와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흥수는 일제 치하인 1912년 기독교 청년학원을 수료하고 191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 동양학원을 나왔으며 청산리 봉오동 대첩에 참전한 후 한때 사회주의 무장 독립신문 원동일보의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던 인물. 귀국 후에는 북만주 무장 항일 단체 광복단과 흥업당의 비밀결사요원으로 활약했으며 1931년에는 민족자본으로 경성고무를 설립하는 한편 대종교 비밀결사단원으로 활동하며 북만주의 대종교 독립자금을 지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흥수의 이같은 배경은 1947년 홍익학원과 홍익대학을 설립하면서 대종교의 원리인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을 대학 설립 정신으로 내세우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6·25 사변 후에는 뜻을 같이하던 대종교 지도자(이극로, 안재홍, 정열모, 조완구) 등이 납북되자 어려움을 겪다가 마포구 상수동에 있는 현 위치에 홍익대학을 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1956년 경영상의 어려움 등으로 이도영씨에게 이사장직을 내준 후 홍익대 설립 역사는 다시 한번 논란과 수난에 휩싸이게 된다.
이도영은 1938년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왔으며 1947년에 동양활성광업주식회사에 이어, 49년에는 남한제사를 설립할 정도로 당대에는 능력 있는 청년 실업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1950년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헌법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한국원양어업(1951년), 청주방직(1954년), 충청일보(1954년) 등을 인수하는 등 경제계의 중요 단체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산학일체'의 이념은 바로 그의 이같은 배경이 이유가 됐다.
그런데 그는 우선 경영상의 어려움에 처한 홍익대학의 새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약속한 종합대 건설과 자신의 재산 10억환, 유엔 운크라차관 배정 등의 약속을 제때에 이행하지 않으면서 졸업동문과 재학생들간에 심한 갈등을 야기시켰으며 급기야는 재단 퇴진 운동으로까지 확산되면서 1961년 이사징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면서 1963년에는 다시 재단 이사장직에 복귀하였으며 사실상 이때부터 군사 정권과의 밀접한 연관을 맺기 시작했다는 것이 설립정신 왜곡을 지적하는 시각이다.
이런 지적이 이는 이유는 바로 이 무렵 이도영이 자신의 둘째 아들 이석훈(홍익대 재단 이사 역임)과 박정희의 처 육영수의 오빠 육인수(홍대 재단 이사 역임)의 딸 육해화가 결혼, 권력과 사실상의 인척관계를 형성한 점, 권력 주변 인물들이 홍익대 재단에 직·간접 영향을 미치면서 학교 운영에 간여한 점, 그리고 홍익대 명의의 흉상을 군부에 기증하는 등 군사 정권 하에 권력 실세로 성장하며 재산을 축적한 점 등이 꼽히고 있다.
특히 1973년 이도영이 운명을 달리하고 그의 부인 최애경이 재단 이사장에 등극하면서 그의 동상이 제작돼 조치원캠퍼스에 전시되는가 하면, 기틀을 다진 사실상의 설립자로 추앙되면서 이때부터 이흥수의 존재와 건학 정신은 점차 일반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실제로 이 시기에 학교를 다닌 동문들은 지금도 이도영을 설립자로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홍익대학은 유교적 전통을 계승하려던 양대연과 '홍익인간' 이념을 내세운 대종교 출신의 독립 운동가 이흥수, 자유당 정권과 군사정권으로 연결되는 권력의 핵심에서 '산학일체'의 이념을 내세운 이도영 재단을 거치면서 지향점이 서로 달랐다. 때문에 설립 정신이 왜곡되거나 폄하되었다는 주장은 어쩌면 이들의 존재 이유를 살펴볼 때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학교측은 이런 사실들을 밝히는데 소극적으로 임함으로써 민족 운동 단체들이 박정희 흉상을 철거하는 등의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도록 만든 원인 제공자가 된 셈이다.
일제와 해방을 거치면서 국내에는 저마다 교육이념과 목표를 달리하는 무수한 대학이 설립되거나 성장했다. 그러나 설립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설사 부족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하더라도 역사는 있는 그래도 전달되고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홍익대학은 지금이라도 박정희 흉상을 철거하고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을 펼치는 이들의 생각과 가치를 올바로 파악해 설립 역사를 복원하고 미흡한 부분을 정리해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것은 대학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못지 않게 중요한 산 교육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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