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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대학 비사] 1년을 마무리하며 …
[대학 비사]를 연재하기 시작한지 만 1년이 됐다. '한국 대학에 대한 역사'는 그간 이 분야를 전공하는 교육학 전공 교수들이 이미 많은 연구를 해왔다.
때문에 본사가 연재를 시작한 [대학 비사]는 이미 이뤄 놓은 이 같은 연구업적에 많은 도움을 얻으면서도 지금까지 연구된 정사의 측면에서 다루지 않은 이면사를 찾아 나가려고 애썼다.

야사적인 측면이 때로는 정사의 기록보다 더욱 중요한 역사의 증언이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며 교육 전공 기관이 아닌 언론 매체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록은 욕심대로 하자면 지금의 성균관이 태어났던 6백년 전부터 더듬어 나가고 싶었지만 시사적인 언론매체의 특성상 오랜 과거의 역사를 10년, 20년씩 해 나갈 수 없고 그보다는 지금의 우리 현실에 가장 가까운 의미를 지니는 시기부터 다루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부득이 해방 후부터 50년의 역사를 다루기로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여기서 '시급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해방 후부터의 대학 이면사를 말해 줄 증인들이 이미 80∼90세를 넘어서고 있어 저 세상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사방으로 뛰어 다니던 취재 기자가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다른 어려움이라면 얼마든지 극복해 낼 인내력도 있고 요령도 있었지만 꼭 만나야 할 증인이 이미 사라져 버렸다면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작한 [대학 비사]는 해방 후 반세기에 걸친 것이지만 그 대학들 중 명문대는 이미 거의 1백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숭실대를 비롯해서 세브란스와 연희와 이화 등이 모두 그렇다. 그래서 지난 50년간의 대학 이면사를 파헤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몇몇 대학들의 설립 배경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부득이 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명문 사학들이 태동된 시기는 갑오경장 이후 우리의 근대화가 시작되던 시기에 해당되며 그것은 불행히도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화문명에 눈뜨고 계급타파와 함께 누구나 교육의 균등한 기회를 외치며 교육사업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제의 벽에 부딪쳐 번번이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일제는 식민지에서의 고등교육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숭실과 연희, 보성, 이화 등에 아무리 우수한 인재가 모여들었어도 그곳에 대학이란 이름의 간판을 붙이지 못했다.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하게 대학의 간판을 걸었지만 그것은 우리의 민족적 역량 양성을 위해 만들어진 대학이 아니며 한국인은 극소수만 입학이 허용되었다. 그러므로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그 동안에 쌓이고 쌓였던 온 민족의 배움에 대한 욕구가 활화산처럼 폭발, 분출하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본지는 이 같은 시기로부터 2천년의 새 시대를 맞는 금년까지의 반세기에 걸친 우리 대학의 역사를 밟아나가며 여기에 '저 분노의 땅에 상아탑을 세워라'라는 부제를 달았다. '분노의 땅'이라고 말한 것은 해방 후 대학 설립 열기의 확산이야말로 민족적 분노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돼 버린 것은 일제가 우리보다 30년은 앞서서 근대화됐기 때문이며 그것은 일본의 선구적인 교육자들의 역할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먼저 배우지 못한 것이 서러웠고, 그들의 우민정책에 희생되고 억울하게 당했기 때문에 그 분노가 해방 후의 교육열로 폭발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분노는 식민지 시대의 분노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해방은 곧 일제를 대치하는 다른 강대국에 의한 분할 점령으로 바뀌고 독립의 꿈도 무산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지는 이 땅을 '분노의 땅'으로 표현했으며 그 분노가 곧 상아탑의 열기로 분출, 확산됐다고 본 것이다.

당시 우리 민족이 겪었던 분노 또는 좌절감은 [대학비사]를 엮어 나가면서 또 다시 필자의 가슴에도 진하게 전달되어왔다. 그것은 조국의 분할 점령과 미 군정통치라는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비록 미군에 의한 군정이 베풀어지고 교육학도 모르는 한낱 육군대위가 문교정책의 최고 사령관이 된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였다. 한국 실정이나 교육에 문외한인 그가 처음부터 붙들고 자문을 구하기 시작한 한국인은 바로 일제 패망 전날까지 총독부 학무국장에 재직하던 친일분자였다.

따라서 그 주변에 몰려들어 점차 우리 교육의 운명을 걸머 쥔 사람들 중 다수가 친일경력을 지닌 인물들이었으니 분노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됐던 최현배나 정인보 등은 다만 중심세력과의 학연관계와 함께 그들의 친일색깔을 조금이라도 은폐하기 위해 참여의 기회가 주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런 인물들의 등장은 교육정책 수립에 작은 위안이 될 수는 있었다.

해방 후 새로 설립되기 시작한 대학은 대개 고등교육을 통해서 민족중흥을 꾀하려는 우국지사들이 주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느 대학이나 대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으며 특히 전쟁 반발로 인해 대학 운영은 극도의 난관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강인한 의지로 다시 일어서고 재건의 의지를 다졌으며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중단없는 교육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설립자가 잇따랐다.

그러나 대학에 정치 권력이 개입하면서 많은 변수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일부의 대학 운영 관계자가 군부독재정권과 유착관계를 맺으며 학원의 독재자가 되기도 하고 학원을 개인 소유화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려운 재정난 때문에 대학 운영권을 대통령에게 스스로 상납, 포기하는 사태도 빚어졌다.

이런 비사를 밝혀 나가다보니 취재는 가능했지만 다른 어려움이 따르기도 했다. 이미 증인들이 사라져 버린 경우에는 진실탐구가 한계에 부딪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많은 관계자들이 살아 있는 경우에는 이해관계로 말미암은 방해가 잇따랐다.
심지어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사람으로부터의 협박과 입에 담지 못할 야비한 욕설까지 하는 전화도 많았다. 때로는 해당대학으로부터 기사화를 유보해 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노 교수들이 증언을 해 주면서도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꺼리기도 했다.
역사는 증인들이 사라지기 전에 산 증언을 통해서 기록해 나가야 하지만 친일의 뿌리와 독재정권의 3 세력들 및 그들과 밀착돼있던 대학 관계자들이 그대로 있는 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와 공개적인 기사작성은 매우 어려운 것이 아직도 대학 사회의 현실인 셈이다.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12-11 오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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