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말 고려대 총장 예비심사 선거에서 탈락해 대학가에 적잖은 충격을 줬던 어윤대 고려대 교수(62.경영학과)를 1일 만났다. 평교수로 돌아와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그를 불쑥 불러낸 이유는 단순하다. 여전히 대학가에서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는 그에게서 우리 대학의 발전 방안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또한 총장에서 평교수로 돌아오기 까지 겪은 그간의 일들에 대한 소회도 궁금했다. 오랜만의 외출인 듯 반갑게 인터뷰에 응한 어 교수는 변함없는 자신감과 여유를 보여줬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 고등교육의 발전을 위한 제언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어 교수는 정년 퇴임 뒤에는 정치도 대학도 아닌 전공인 금융 분야에서 새 인생을 출발하고 싶다는 소망도 피력했다. 어 교수와의 인터뷰는 본지 이인원 회장이 진행했다.
정년 이후 진로 구상 중
총장 재선에 도전하기 전까지 어 교수는 2003년부터 4년간 고려대를 '세계의 고려대'로 만든 총장으로서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의외의 실패를 경험한 뒤 평교수 어윤대로 돌아갔다. 그는 덤덤했다.
"그동안의 일에 대해 아쉬운 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안될 거라고 예측도 했으니까요. 그런 일로 인해 직선제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 일 보다는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는 일에 몰입하고 있었다. 자신의 퇴임 후 진로에 대해 고려대 동문들이 편견 없이 믿어주지 않겠냐는 기대까지 내비쳤다.
"솔직히 개인적인 고민 중의 한 가지는 큰 대학의 총장을 했던 사람이 퇴임 후 격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을 걱정하는 사회적 분위기예요. 기업체 임원들은 퇴임하면 시간제 경비일도 한다던데(웃음), 대학도 이제는 분위기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는 전공 분야인 금융권에서 제2의 삶을 살거나 순수하게 봉사하는 삶을 고려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모 대선후보 측의 제안에 따른 정치권 행은 고려해본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하는 성격인데다, 목표(결과) 지향적이어서 정치 능력이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해당 후보와는 고려대 동문이고 친분도 두터운데 오히려 그런 점이 후보에겐 누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대학에서 총장직 권유는 없었냐는 질문에도 마찬가지 답이 돌아왔다. "여러 군데서 제의가 들어왔지만 모교인 고려대만큼 열정을 쏟을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어 거절했어요. 제가 어떤 면에서는 정말 '고대인'이거든요. 고려대 총장으로서는 발전기금을 모으기 위해 '안면몰수'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다른 대학에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고등교육 1조원 증액 엄청한 기회"
어 교수는 정년 후 삶을 고민하는 평범한 60대의 면모를 물씬 풍겼다. 하지만 대학과 관련된 현안에 대해서는 전직 총장답게 열정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특히 최근 정부가 내놓은 고등교육 예산 1조원 증액 방침에 대해서는 큰 환영의 뜻을 밝혔다.
"현 정부가 교육정책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아 온 게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고등교육 예산 1조원 증액은 임기 말에 매우 잘한 일입니다. 우리 대학이 발전할 수 있는 전환의 계기가 될 겁니다"
어 교수는 지방 사립대의 경우 교수 당 학생 수 비율이 너무 높아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이번 정책에 따라 대학의 연구 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 정부의 교육목표 중 하나인 평준화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혔다. 그는 평준화의 긍정적인 취지는 이해하지만 문제 해결 방식에 있어서 보다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급격하게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대학을 통해 전문분야로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잖아요. 그런데 지난 50년을 보면 몇 개 대학이 독식해 온 게 사실입니다. 3개 대학(서울대, 고대, 연대) 정원이 미국 아이비리그 10개 대학 정원과 맞먹는 사실만 보더라도 소수의 대학에 엘리트가 집중돼 온 것을 알 수 있죠. 인구수로 따져보거나 국력으로 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국가발전이나 경제발전에도 옳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평준화에 대한 전제는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신 어 교수가 주장하는 문제해결 방식은 상향식 평준화다. 모든 대학을 세계 최고로 만든다는 목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향평준화가 아닌 모두가 발전하는 상향식으로 이뤄져야 해요. 특목고의 경우에도 교육의 다양성을 위해 폐지가 아니라 증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 교수는 고등교육 발전 방안에서도 나름의 해법을 내놓았다. 대학간 인위적 합병 보다는 4년제가 2~3년제 전문대학으로 체제를 바꾸는 전문인 양성 교육을 주장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이 오히려 대학생 취업난을 부추기고 대학들의 합병 등 구조조정을 유발하고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어 교수는 유럽 국가들처럼 전문인을 양성할 수 있는 전문대학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대학 교육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가능성'에 중점을 둬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몇 년제 대학인지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전문가를 길러낸다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뒤따라야 합니다. 또한 정부는 대대적인 리서치를 통해 대학에 방향제시를 할 수 있어야 하구요."
"대학 개혁은 계속돼야"
한 때 대학가에 개혁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던 만큼 어 교수는 대학가에서 감지되는 변화에도 남다른 소견을 피력했다. 특히 최근 파격적인 정년 심사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서남표 KAIST 총장에 대해 격려와 기대의 말도 덧붙였다.
"서 총장님의 용기와 결단력을 높게 평가합니다. 변화를 위해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하는데 (서 총장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역할을 했다고 봐요. 그런데 한국 교수들은 자존심으로 먹고 살잖아요. 국내 대학가에 소위 세컨더리 마켓(Secondary Market : 2차 시장)이 없어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도 예상됩니다."
미국의 경우 한 대학에서 재임용에 탈락하면 타 대학으로의 이동이 비교적 쉽지만 우리 대학가에서는 녹록지 않은 만큼 이후의 상황도 고려해야 개혁의 역풍을 상쇄할 수 있다는 조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을 달지 않았다. 그는 대학의 지배 구조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보직교수들, 특히 학장들의 임기가 2년인데 이 기간에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어요. 우리 사회가 온정주의여서 2년 뒤 교수로 돌아갔을 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교수들이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인거죠. 제가 총장 재직 시 미국의 모 대학 학장이 방문했는데 6년간의 임기를 끝내고 새 임기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아시아 대학과의 교류협력 차원에서 순회 중이라고 했는데 장기적인 플랜이 가능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총장 직선제 역시 우리 대학이 개선해야 할 시급한 과제 중 하나로 지적했다. 고려대의 네거티브 방식의 총장 선거에서 발목이 잡힌 개인적 이유를 넘어 선출제를 도입한 서구의 대학들의 경우, 경쟁력을 갖춘 대학이 많지 않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다. 어 교수는 400년 역사를 가진 미국의 대학들이 다양한 시도 끝에 임명제를 유지하는 것을 들어 현 직선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개혁 촉매제 역할에 보람"
그는 대학 사회가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는 지금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적절한 시기라고 밝혔다. 최근 국내외에서 대학 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대학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봤다. 그리고 자신이 개혁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자부했다.
"서울대가 독식해오던 자연계가 카이스트나 포항공대 등과 경쟁하는 시대가 되면서 교육을 잘 하고 학생들이 열심히 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의 변화가 오고 있는 것 같아요. 또 국내외 대학평가 때문에 분발하는 측면도 있구요. 여러 가지 제도 때문에 자율성이 묶여있는 환경도 문제이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대학 사회가 경쟁하고 노력한다면 개선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현실을 탓하기 보다 대학 내부의 개혁과 의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어 교수를 촉매로 시작된 대학의 개혁이 그 결실을 맺을 지 관심이 모아진다.
<대담 본지 이인원 회장 ·사진 한명섭 기자 ·정리 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