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에 인증제도 준비 움직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인문사회계열에서는 경영학교육인증, 이공계열에서는 공학교육인증이 대표적이다. 대학들이 앞다퉈 인증제도 준비에 나선 것은 ‘표준화’를 통해 검증된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능력을 공인받기 위해서다. 각종 대학평가에서의 순위경쟁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최근의 추세와도 맥이 닿는 대목으로, 객관적 평가를 통한 공신성 확보로 대학 위상 제고와 국제경쟁력 강화가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일단 대학 관계자들은 이 같은 인증제도에 대한 인식 확산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분위기이다. 인증제도 심사 통과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교육 커리큘럼 개선과 인프라 확충이 필수적이므로, 자연히 교육과정의 전반적 발전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얘기다. 그간 대학 지명도에 따른 암묵적 서열 짓기에 그치거나, 적절한 평가의 틀거리가 부재해 대학간 객관적 비교가 불가능했던 관행도 개선될 것이란 목소리도 높다.
그러나 반대편에는 인증제도의 그림자 또한 존재한다. “인증을 위한 인증”, “목적과 수단의 전도”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인증을 받기 위한 대학간 경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실제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대외 이미지를 의식해 인증 준비에 나서는 측면도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교수들은 수업 외 업무 부담이 커진다는 점, 학생들은 수업 수강이 제한된다는 점 등을 들어 인증제도의 졸속 준비를 비판하고 있다.
◆경영학교육인증(AACSB)= 최근 국내 대학들이 경쟁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경영학 분야 인증제도로는 미국 경영대학협회(The Association to Advance Collegiate School of Business·이하 AACSB) 인증을 꼽을 수 있다. AACSB는 교수진·커리큘럼·연구실적·교육시설·학생수준·학점 등 총 21개 부문을 검토해 총체적인 경영학 교육의 질을 평가해 인증을 부여한다. 전세계적으로 1,000개 이상의 대학이 인증을 받았으며, 국내 대학으로는 고려대·서울대·KAIST·세종대가 인증을 획득했다.
AACSB 인증을 획득하면 해외 경영대학에 유학시 국내 대학에서의 취득학점을 그대로 인정받는 등의 이점이 있다. 이는 교환학생·유학생들의 국제 학점교류 증가로 이어지며, 국내 대학생들의 해외 취업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대 경영대학 학부, KAIST 경영대학원이 각각 AACSB 인증을 받은 데 이어 2005년 고려대의 경영대학 학부·대학원 과정이 동시에 인증을 획득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올해 5월에는 세종대가 연세대·서강대·한양대 등을 제치고 AACSB 인증 획득에 성공하면서 대학간 경쟁에 불을 지폈다.
실제로 이들 대학은 지난 1학기 미국에서 열린 AACSB 총회에 대거 참석하며 인증 준비에 골몰하고 있다. 연세대 경영대학 이문규 교수는 “전임교원 확보율, 연구실적과 같은 수치상 기록 뿐 아니라 커리큘럼의 특성화 방안, 프로그램 성취도, 기업 연계 교육 등 다양한 평가 분야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면서 “이 같은 다면적인 교육 분야·요소를 연차평가·실사 등 다단계 평가를 거쳐 인증을 부여하기 때문에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려대 경영대학 김대호 교수는 “인증을 받았는지 여부가 상당히 중요하다”면서 “예컨대 AACSB 인증을 받지 못한 대학은 해외에서 취득학점을 인정받지 못한다. 경영학 교육의 질을 보장하는 인증이 없다면 대학이 아닌 ‘일반 학원’일 뿐이라는 인식이 높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경영환경이 갈수록 국제화되는 상황에서 인증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인증 획득으로 인한 체질 변화라는 긍정적 성과에도 불구, 이에 뒤따르는 각종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대학 입장에서는 인증 획득 및 유지를 위해 재정적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AACSB 인증과 더불어 유럽경영대학협의회의의 인증제도인 이퀴스(EQUIS)를 획득한 고려대의 경우, 교수 1인당 학생수 15명 이내’와 ‘전임교원 강의비율 75% 이상’을 달성해야 하므로 교수 충원 문제가 제기된다. 더군다나 국제화 교육을 목적으로 영입되는 외국인 교원에게는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이미 인증을 획득했더라도 이 같은 세부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연차평가를 통해 인증이 박탈되기 때문에 고삐를 늦출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또한 인증 기준에 따라 소속 학생들의 장학금 수급률도 70% 선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등 추가 재원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성적 하위자 10%에게 등록금을 배로 늘려, 추가 확보된 금액으로 나머지 학생들에게 주는 장학금을 충당한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던 고려대 경영대학의 방침은 이 같은 인증제도에 발목을 잡힌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소위 상위권 대학들보다 한 발 앞서 AACSB 인증을 획득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세종대도 이면에서는 편법 논란이 제기됐었다. 경영대학 소속 일부학과 중 인증 기준에 미달하는 학과를 단과대학에서 제외시켜 평가 받았다는 지적. 이를 두고 인증을 받기 위한 ‘보여주기식 행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서강대·경북대 등 AACSB 인증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의 학생들은 수강권 제한에 대한 불만이 크다. AACSB 인증 요건에 포함된 수강정원 상한선 규정에 따라,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을 수강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수전공·이중전공 제도를 통해 경영학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탓에 실수요에 비해 개설과목이 부족한 사례도 발견되고 있다.
서강대생 이현정(가명·경영학) 씨는 “수강신청이 치열해져 꼭 들어야 할 수업을 못들을 뻔했다. 수업 질 개선을 목표로 하는 인증제도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졸업을 눈앞에 둔 학생들의 편의부터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조건 서둘러 인증을 획득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제약을 감안해 차근차근 준비해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AACSB·EQUIS 등 인증제도는 왜곡된 시스템을 개선하고, 현장중심형 커리큘럼의 특성화를 촉진하는 등 분명히 장점이 있다”면서도 “인증에 따른 재정 부담이 커질 우려가 있는데, 이를 백안시하고 인증을 받는 데만 급급한 것 같다. 또한 인증을 준비하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기존 학생들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므로,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내실을 충분히 다져가면서 인증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공학교육인증(ABEEK)= 인문사회계열에서 경영학교육인증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면, 이공계에서는 현장 맞춤형 공학인재 양성을 내용으로 하는 공학교육인증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됐다. 한국공학교육인증원(원장 서남표·이하 ABEEK)은 각 대학에 설치된 공학교육혁신센터·공학교육연구센터와 연계해 다양한 커리큘럼 마련에 나서고 있다.
ABEEK 인증제도는 공학인재가 ‘공돌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공 이외의 지식이나 업무능력이 미비했다는 점에 착안했다. 학점 등이 평가요소로서의 적합성이 떨어졌던 점을 보완, 60학점 이상의 전공수업을 수강하는 등 전공충실도와 교육과정에서 총체적 실무능력을 담보하는 인증 커리큘럼을 마련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문일 한국공학교육연구센터 소장은 “현장을 둘러보니 공과대학 졸업생들이 의사 전달이나 대인관계 등 타 구성원과의 협업 능력이 부족한 것을 실감했다”면서 “기업체에 취직했을 때 필요한 현장 업무능력을 길러주는 데 그간의 공학교육은 지나치게 소홀했다.
ABEEK 인증은 전공지식의 심화교육 뿐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스킬 증대 등 현장에 적합한 실무능력을 기르는 데 역점을 두고 개선해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ABEEK 인증을 처음으로 도입한 2001년 2개 대학이 인증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25개 대학이 인증을 획득했으며, 올해에만 30여개 대학이 인증을 신청하는 등 ABEEK 인증 획득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간 인증에 따른 기대효과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았으나, 삼성전자가 ABEEK 졸업생들에게 입사 지원시 10%의 가산점을 주기로 결정하면서 학생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중앙대 공과대학 한중근 교수는 “삼성전자의 가산점 부여에 따라 당장 학부모들이 대학에 ABEEK 시행 여부를 문의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렇듯 ABEEK 인증은 대체로 긍정적 호응을 얻고 있다. 인증 준비와 유지를 위해 교육·연구 인프라 개선에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일정한 요건만 갖춰지면 지방대도 인증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대학 지명도가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ABEEK 인증이 아직까지는 성과가 미흡하다는 비판 여론도 만만찮다. 지난 6월 연세대 공학교육혁신센터가 기업인사와 공과대학 교수 및 재학생·졸업생 4,400여명을 설문해 내놓은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이 설문 결과에 의하면 기업은 공과대학 졸업생을 “현장 적용력이 떨어진다”고 평가했고, 졸업생들도 “교육과정에 불만족한다”는 대답이 많았다.
이 같은 결과는 교수 위주의 폐쇄적 공학교육 시스템의 탓이 크다. 윤우영 ABEEK 대외협력위원장은 “교육 혁신이라고 해봤자 우수 연구실적 교수를 초빙, 교수 요구에 맞춰 기존 커리큘럼 개설을 답습하는 게 현실”이라며 “학생 중심 수업으로의 인식 전환이 있어야만 기업의 요구도 적절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학교육 혁신 과정이 장시간의 투자가 필요한 데 비해 대학별 교수업적평가에는 이 같은 노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도 걸림돌이다. ABEEK 인증보다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게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게 현실이라는 것. 한 공과대학 관계자는 “적재적시에 써먹을 수 없는 SCI 등재 논문보다는 산학 현장의 피드백이 중요하다. 인증 과정에 ‘산학협동’ 등 필요 항목을 산입하고, 교수업적평가에도 관련 요소의 배점을 높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ABEEK 인증제도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예컨대 실무 중심 교육과정 강화 프로그램인 ABEEK 인증과 기초과학을 기반으로 해 연구중심·대학원중심대학을 지향하는 BK21 사업은 상충된다. 서로 다른 목적과 성격을 지닌 사업임에도 불구, 대학 입장에서는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양쪽 프로그램을 동시에 추진함에 따라 갈피를 못잡고 있는 것이다. ABEEK와 연계하는 기관도 공학교육혁신센터·공학교육연구센터로 분화돼 있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 서울대 공과대학 김도연 교수는 “ABEEK 인증은 국제적 경쟁력 획득과 공과대학 교육 혁신을 위해 유용한 제도”라며 “다만 이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넓은 범위의 개방과 경쟁체제를 대학에 전면도입해야 한다. 또한 국가지원정책의 정비와 함께 대학 내부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