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을 앞두고 대학가에 ‘정치 바람’이 불고 있다. 교수는 물론 현직 총장마저 대선 후보 캠프를 들락거리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총장·교수들은 “법적으로 문제없다” “우리의 지식이 정책이 되면 공익에도 도움이 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지만, ‘학문 연구’라는 상아탑 본연의 임무를 잊은 이들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따갑다.
총장·교수들의 정치 참여는 대선과 지방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해묵은 논쟁 중 하나로, 지난달 박범훈 중앙대 총장이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 문화예술정책위원장을 맡으며 또다시 점화했다.
중앙대 교수협의회는 지난달 23일 ‘박범훈 총장의 경솔한 정치개입을 규탄함’이라는 성명을 내 “박 총장의 정치참여 선언으로 학교의 이미지가 심하게 손상됐다”면서 박 총장의 사퇴를 촉구한데 이어 지난 2일부터 9일까지는 박 총장의 진퇴를 묻는 신임투표를 진행했다.
박 총장이 이 후보 캠프의 직위와 중앙대 총장직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둘 다 수행해도 무방한지를 묻는 설문조사도 함께 진행했다. 투표 결과는 오는 13일 발표되며,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교수협의회는 총장 해임권고안을 재단이사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폴리페서 “교수의 지식 전수해야 정책선거 된다” 항변
현재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캠프에는 1000여명에 달하는 교수들이 활동 중이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캠프에도 100여명이 넘는 교수들이 포진한 상황이며, 이인제 민주당 후보와 심대평 국민중심당 후보,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 캠프에도 상당수 교수들이 기웃거리고 있다.
이처럼 ‘정치하는 교수’를 뜻하는 ‘폴리페서’들은 자신의 행위가 “문제 될 것 없다”고 주장한다.
이명박 후보의 핵심 브레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정책기획팀장을 맡은 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폴리페서에 대해 “교수는 정당에 가입할 수 있으며 정치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폴리페서가 많다. 정치 활동은 교수 자율에 맡길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지식과 정치 노하우를 후보에게 전수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책선거가 안 된다”면서 오히려 그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동영 후보의 정책위원장으로 활동 중인 권만학 경희대 국제학부 교수 역시 “정치인과 지식인이 결합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다”며 “전문지식을 상아탑에만 가둬두지 않고 정책으로 연결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문국현 후보의 정책자문인 윤원배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 역시 “정치활동과 자문활동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며 “후보의 철학이나 정책을 공유하고 인간적인 매력에 끌려 후보를 돕는 것은 괜찮다”고 밝혔다.
“논문·저서보다 정치권 줄만 잘 서면...”
하지만 책을 놓고 여의도로 발걸음을 향한 이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비난하는 이들은 교수 본래의 직분이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임을 돌아볼 때, 권력에 기웃거리는 교수들의 태도는 ‘줄대기’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교수직을 권력의 세계로 나가는 징검다리로 생각해 대선뿐만 아니라 각종 선거 때만 되면 캠프를 노크하고 자진해 정책을 바치는 교수들도 상당수다. 교수의 정치 참여를 두고 ‘정부 요직과 국회의원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이 여전히 따라다니는 것은 이런 이유다.
지난달 23일 새언론포럼이 주최한 ‘언론인과 교수의 정치참여’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았던 김창룡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서울과 수도권의 웬만한 교수치고 직·간접적으로 캠프에 관계를 맺지 않은 교수가 이상하게 보일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며 “운 좋게 배팅을 했을 때 장관자리나 국회의원 공천, 청와대 수석 등은 떼놓은 당상이며, 공기업 사장과 감사, 이사 등 권력을 잡아 전리품을 챙기는 선배 폴리페서들도 쉽게 목격했다”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논문 하나 발표하고 저서 한 권 더 내는 것보다 정치권에 줄만 잘 서면 평교수에서 일약 총장으로, 장관으로 자리 이동할 수 있다는 현실은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라며 폴리페서들이 학문 연구풍토를 저해하고 학계에 권력지상주의를 부추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선돼도 교수직 보장” 관대한 법 규정 여전
교수들의 정치 참여에 관대한 법 규정도 폴리페서들이 활개치도록 한몫을 하고 있다. 현행 공무원교육법 제44조(휴직) 2항에 따르면, 정당의 당원이 될 수 있는 교원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때에는 국회법에 의거해 임기 중 휴직처리를 하고 있다.
아울러 3항에 따르면, 대학에 재직 중인 교육공무원이 교육공무원 외의 공무원으로 임용되더라도 휴직을 원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임기를 마치면 자동 복직된다. 권력을 향해 교문을 나서는 것도 자유롭고, 설사 ‘올인’ 하다가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교수직은 보장받는 셈이다.
지난 2004년 7월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주최한 대학총장 세미나에서 당시 회장이었던 박영식 전 광운대 총장은 대학교수의 정계 진출을 보장하는 이 법의 항목을 개정하는 결의문을 작성해 총장들에게 의견을 물었다가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박 전 총장은 “이 조항이 ‘정치교수’를 양산해 대학 내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한다”고 개정 이유를 들었다.
박 회장은 “교수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대학은 4년간 수업을 강사로 때우고, 선거 때마다 교수들이 양 진영으로 갈라진다”며 교수의 정치참여 보장 규정을 재검토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법 개정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같은 달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 등 여야 의원 13명이 나서서 대학에 재직 중인 교육공무원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거나 정무직공무원으로 임명되면 교직을 사직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심 의원은 제안 이유로 “선거 때만 되면 공직선거에 입후보하려고 휴강을 예사로 하거나 정치적 견해 차이로 학원 내 논쟁을 일으키거나 장기간 개설강좌가 열리지 않는다”며 “그 피해를 학생들과 학교가 입고 있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심 의원이 낸 개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으로, 3년째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