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첫 해인 2003년 내내 대학정책의 최대 이슈는 지방대학발전이었다. 이 문제는 국가균형발전의 맥락 안에서 취급되었고, 일년 내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지방대학들은 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어 낸 나라다. ‘촛불시위’가 그것이다.
촛불은 잘 꺼진다. 생일 케이크의 촛불은 열 개 스무 개도 단숨에 끌 수 있다. 이렇게 가냘픈 것이 촛불이기 때문에 풍전등화는 가장 아슬아슬한 생명의 위기를 상징하는 말이 되고 있다.
이걸 종이컵 속에 켜 들고 길거리로 나간 것이 한국의 촛불 시위다. 이런 촛불 든 사람이 돌 던지고 쇠파이프 휘두르는 폭력은 상상하기 어렵다.
촛불은 아름답다. 촛불이 켜진 종이컵은 하늘거리는 붉은 꽃술을 달고 어둠을 밝히며 밤에 피는 꽃봉오리다. 또 이것은 사랑과 기쁨과 축복과 관용의 언어다.
결혼 축하, 생일 축하, 죽은 자에 대한 위로와 명복과 생전의 모든 허물에 대한 용서까지, 그리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자리의 언어다.
이런 촛불이 이번에는 청계천을 비롯해서 전국 도처에서 어둠을 밝히며 수만 명이 아름다운 밤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것이 거리의 시위 문화라니 이걸 만들어낸 한국인의 창의적 발상법과 그 정신이 경탄스러울 뿐이다.
효순·미선이의 죽음을 비롯해 분노와 슬픔의 극한 상황에서 어찌 돌과 쇠 파이프 대신 이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촛불을 상상해 낼 수 있었을까?
그런데 문제는 심각하다. 한 아줌마는 식탁에 오른 광우병 덩어리를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이 먹고 수년 후 골통에 해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어질어질 비실비실하다가 죽는 걸 상상하니 하도 기가 차서 다음에는 자기도 꼭 유모차 끌고 시위 광장에 나가겠다고 말한다.
이런 아줌마들까지 나오면 시위의 마지막 보충역까지 다 나오는 셈인데 이러다간 당장 나라 전체가 광우병 증세처럼 비실거리지 않을까?
이번 촛불시위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다름이 아니다. 첫째로 이것은 정치적 시위가 아니다.
옛날에 백성들은 배만 곯지 않으면 ‘격양가’를 부르고 춤추며 어느 놈이 임금이 되든 탓하지 않았다. 이번 촛불 시위는 바로 이런 비정치적 집단의 생존권 투쟁일 뿐이다.
둘째로 이것은 대의정치에 대한 불신과 도전이다. 의원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너무도 무력하기 때문에 그들의 역할을 비웃고 시민들이 직접 나선 것이다.
셋째로 가두 정치의 주체가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학생들이 점점 빠지는 대신 아줌마에다 일부 고교생들까지 나섰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이 나라 역사발전을 위한 투쟁의 주체는 항상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 나라의 민주화도 없었다.
그만큼 그런 역할은 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 업은 아줌마나 입시준비에 파죽음이 되어 있는 고교생들은 그것만으로도 너무 벅차다.
그런데 이들까지 나서고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오늘의 대학생들이 너무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운동권출신이면 정치가로 출세 길도 열리기 때문에 했던 학생운동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학생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반쪽이 억압과 굶주림의 지대인데도 침묵하는 오늘의 한국 대학생은 정의를 아는 지성인 집단이 아니다.
입시지옥을 비롯한 교육계의 모순도 그렇다. 그 지옥을 겪고서도 후배 고교생들을 위해 아무 일도 안하는 선배들은 참된 지성인 집단이 아니다.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그렇다. 아줌마와 고교생까지 나서는 촛불 시위장의 함성은 이런 대학생들에 대한 항변의 의미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