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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논문은 해외로, 국내 학술지 고사 직전
SCI 논문위주 대학 평가로 국내 게재 꺼려
정부·학계 나서 학술지 육성 방안 마련해야

 

“요즘은 학회 편집위원장을 맡으면 원고 청탁하러 다니는 게 주된 일이다. 논문 편수를 확보하는 일이 너무 어렵다.”

국내 학술지의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 대학 교수의 말이다. 대학평가 등이 국제과학논문색인(SCI) 게재 논문을 기준으로 이뤄지면서 국내 학술지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BK21부터 SCI 게재 논문 중시=국내에서 SCI 게재 논문이 중요한 평가 잣대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다. 국민의 정부 때 ‘대학원 중심의 연구대학 육성’을 목표로 시작한 BK21 사업에서 SCI 등재지가 기준이 되면서다. BK21사업 1단계 종료 후 국내 과학기술분야 SCI급 논문 수는 수직 상승했다. 사업 시작 전인 98년 당시 3765편이던 SCI 게재 논문은 2005년 7281편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 사이 국내 학술지의 형편은 어려워 졌다. 괜찮은 논문들은 모두 해외 SCI 등재지로 빠져나갔다. 더욱이 2000년대 들어 대학들이 국내외 대학평가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교수업적평가에서 SCI 게재 논문을 주요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공계 분야에서 SCI 게재 논문 편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됐다. 고려대의 경우 자연계 분야 조교수가 부교수로 승진하려면, SCI 게재 논문 5~7편 이상이 필요하다. 경영계·의학계 교수 평가에서도 국내 학술지 게재 논문은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상위 5개 대학의 교수평가기준의 평균치를 적용한다는 한양대도 이공계 분야에선 SCI 게재 논문이 기본이다. 이형규 한양대 교무처장은 “교수 임용·승진 시에는 기본적으로 SCI 논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논문투고 급감 학술지 제작 힘들다=국내 학회에서는 점점 학술지 만들기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일부 학회에서는 학술지 등급을 유지하기 위해 논문 게재 실적을 허위로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대기환경학회 편집위원인 김기현 세종대 교수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필요한 논문 편수의 2~3배가 투고돼 선별해서 게재했다”며 “그러나 지금은 필요한 논문편수의 1.5배 정도 밖에 들어오지 않아 간신히 학술지를 만들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까지 한국식물분류학회 편집위원장을 지낸 이남숙 이화여대 교수도 “필요한 논문 편수의 1.5배가 채 되지 않는다”며 “논문 투고량도 줄었지만, 질도 떨어지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나마 1.5배는 나은 편이다. 군소 학술지의 경우는 필요한 논문편수의 50%도 채우기 어렵다. 한 군소 학회지의 편집위원장인 한 교수는 “아예 논문이 들어오지 않아 학회지 발간을 못하고 있다”며 “편입위원장이 논문을 구걸하러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군소 학회지 편집위원장도 “학회 이사들에게는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강제적으로 논문을 투고하게 한다”고 토로했다.

최근 연구윤리가 강화되면서 아예 국내 학술지에 논문 싣기를 꺼리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과거에는 선행연구 결과를 자신이 속한 학회지에 게재하고, 이를 보완해 해외 저널에 발표하는 사례가 많았다”며 “그러나 지금은 향후 이중게재 시비에 휘말릴 것을 우려해 아예 국내 학술지에 논문게재를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세계적 학술지 육성 방안 마련해야=물론 학회와 학술지가 우후죽순 늘어난 점을 문제 삼는 의견도 있다. SCI 논문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오히려 난립하는 학술지를 정리하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한지질학회 편집위원회 부위원장인 윤성택 고려대 교수(지구환경과학)는 “국내 학술지에도 살려야 할 게 많지만, 학술지가 너무 난립하다보니 정리할 것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학술지가 살아야 국가의 학문적 위상도 제고 될 수 있다. 경쟁력 있는 국내 학술지를 지원해, 세계적 저널로 키워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대한전기학회 편집위원장 김상식 고려대 교수는 “한 국가에 세계적 저널이 많다는 얘기는, 그 국가가 해당 분야의 학문적 원류가 된다는 얘기”라며 “특히 이공계 분야에선 학술지의 위상이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과 직결 된다”고 강조했다. 학술지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제기한 윤성택 교수도 “각 학회마다 간판 학술지를 키우고 SCI에 등재되도록 노력하는 등 살릴 것은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내 학술지를 키우기 위해선 국가나 대학이 이를 평가 기준에 반영해야 한다. 연구 실적으로 평가돼야 교수들로부터 논문 투고를 받을 수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SCI 게재 논문이 아니면 논문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폄하하는 일”이라며 “국내 학술지 게재 논문도 대학·교수 평가에 반영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SCI 등재지를 배출하기 위한 국가와 학회 차원의 공동 노력도 필요하다. 현재 1435종의 학진 등재(후보)지 중 SCI 등재지는 10종, SCIE 등재지는 67종이다. 학계에선 SCIE 등재지만 돼도 논문 편수가 늘어나는 효과가 생긴다고 말한다.

김상식 교수는 “국내 저널에 논문을 게재할 때는 저자가 수십만원에 달하는 게재료를 내야 한다”며 “이는 학회들이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인데 정부가 경쟁력 있는 학회를 지원해 게재료 만이라도 받지 않게 한다면 사정이 좀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학술진흥재단 고영만 지식정보센터장은 “해외에서는 국제적인 논문보다는 리저널(regional)하거나 한국에 관련된 논문을 더 보려고 한다”며 “한국이나 아시아 분야로 특화된 저널이 SCI에 등재되는 데 더 용이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국판 SCI, 국내 학술지 살릴까

학진 KIC로 국내학술지 평가 근거 마련
美 톰슨사와 협의, SCI DB와 연계 노력

국내 학술지를 살리기 위한 대안으로 많이 제시되는 게 ‘한국판 SCI’ 구축이다. 한국판 SCI란 학술진흥재단(학진)이 지난해 말 시범 개통에 들어간 KCI(한국학술지 인용색인) 서비스를 말한다. KCI는 학진 등재(후보)지 1435종에 대한 △전체 논문 수 △전체 피인용 횟수 △한국형 인용지수(Kor-Factor), 영향력지수(Impact Factor)를 제공하는 서비스다.

학진은 “국내 논문의 인용정보를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의 끊임없는 기대와 요구를 반영해 2004년부터 시스템 구축을 나섰다”며 “KCI로 국내 학술지에 대한 계량적·객관적 인용분석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국내 학술지가 ‘찬밥’ 신세로 전락한 이유는 개량적·객관적 지표를 제시할 수 없어서다. SCI에 등재되지 않은 국내 학술지는 사실 평가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때문에 국내 학술지 게재 논문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달라고 요구하려 해도 ‘말발’이 잘 서지 않았다.

고영만 학진 지식정보센터장은 “국내 학술지를 평가할 개량적 지표가 없었기 때문에 그간 국내 학술지들이 소홀하게 취급된 것”이라며 “KCI가 활성화되면 국내 학술지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고 말했다.

학진은 KIC의 정착을 위해 최근 5년간의 국내 연구업적을 데이터베이스화 하고 있다. 또한 지난 4월 SCI 저널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한 미국의 톰슨 로이터사를 방문, SCI와 KCI의 데이터베이스를 연계시키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학진은 KCI와 SCI의 데이터 베이스가 연계되면 국내 학술지의 SCI 등재가 용이해 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고영만 센터장은 “KCI를 SCI와 연계시키는 일은 국내 연구결과를 세계적 유통망에 편입시키는 것”이라며 “이는 국내 학술지의 SCI 등재 근거를 확보하는 결과를 낳는다”라고 설명했다. 국내 저널이 SCI에 등재되는 데 있어 KCI가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나아가 학진 자체적으로 개발한 한국형 인용지수(코팩터, Kor-Factor)를 국내 학술지 평가에 적용해 KCI를 활성화시킬 방침이다. 그간 해당분야 교수들의 주관적 평가에 상당부분 의존하던 평가방식에서 벗어나 코팩터를 개량적 지표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학진의 KCI에 대해 학계에선 대체로 환영한다. 국내 학술지를 평가할 마땅한 지표가 없는 상황에서 KCI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기춘 고려대 교무처장은 “KCI 구축은 국내 학술지를 살리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며 “KCI가 정착되면 대학의 교수업적평가 등에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 이형규 한양대 교무처장은 “이공계 분야는 SCI 게재 여부만 가지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영향력 지수가 중요하다”며 “영향력 지수가 높은 세계적 저널에 실리는 것을 중시하는 이공계 분야에서 KCI는 ‘국내용’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신하영 기자 (press75@unn.net) | 입력 : 08-10-17 오전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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