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부정 행위는 한 마디로 사기입니다. 사기꾼이 사기치자고 맘 먹으면 방도가 없죠. 사전 예방이 어려우니 한 번 걸리면 죽는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카이스트에서 지난 2008년 논문을 조작해 특허를 취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와 민간으로부터 25억 원대에 달하는 자금을 모은 교수의 연구부정 사건을 조사했던 서연수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는 사후 강력한 처벌 말고 연구부정 행위를 근절한 방도는 없다고 강조했다.
당시 연구책임자이던 김 모 교수는 이 사건으로 대학에서 해임됐고,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3년간 국가 연구개발사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서 교수는 “김 교수가 기업 연구실에서 일하다 기회를 봐서 10년 뒤라도 다시 교수로 복귀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미국 대학의 경우 연구부정에 대한 검증 규정은 따로 없지만 연구부정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밝혀내고, 문제가 된 당사자도 조사에 적극 참여하는 풍토가 조성됐다. 제대로 조사하지 않으면 해당 기관에 대한 전체 연구 지원을 철회하고, 조사대상자에 대해서는 연방법을 적용해 FBI가 수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미국의 한 교수에게 당신들은 연구부정에 대해 왜 그렇게 철저하게 조사하느냐고 물었지만, 당연한 일이라는 답을 들었다”면서 “그 사람 조사 안하면 다른 사람 연구비까지 날라가고, FBI가 수사한다는데 조사 안 받을 사람이 어디있겠느냐”고 말했다.
특히 연구윤리 선진국의 경우 연구부정과 관련한 조사를 받은 연구자에게는 무혐의로 사건이 종료되지 않는 이상 사실상 해당 분야를 떠나는게 관례다.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 경미한 처벌을 받은 연구자도 향후 연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연구비를 지급하는 기관의 감독 플랜과 소속 기관이 해당 연구자의 연구 데이터를 보증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이럴 경우 연구그룹에 참여하기 힘들어 사실상 이 분야를 떠나라는 의미가 된다”면서 “연구부정 의혹이 있는 연구자가 자발적으로 조사에 적극적인 이유다”고 설명했다.
■ 대학 70% 자체검증체제 구축...실적 저조 = 국내에서는 교수의 연구부정에 대해 학교가 자체적으로 검증하도록 하고 있다. 내부 고발자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거나, 학교 내부에서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드러내봤자 학교와 교수만 망신당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카이스트 김 모 교수의 사례는 학교와의 지적재산권 분쟁이 벌어지면서 드러난 것이다. 국가지정연구실(NRL)을 운영하며 수십건의 논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아온 성균관대 생명공학부 김 모 교수의 경우 학내 징계가 유야무야될 공산이 커지고 있는 케이스다.
한국연구재단이 지난 6월 김 교수에게 3년간 국가연구개발사업 참여 제한 조치를 취했지만, 학내 징계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모 교수는 “소문에 의하면 학교에서 덮으려고 하는 것 같다”면서 “알려봐야 득볼 게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국내 대학들에 연구부정에 대한 자체검증시스템이 없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현재 전국 385개 대학과 출연연구기관, 연구지원기관 중 73%에 해당하는 281곳이 연구윤리 자체검증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지난 2005년 12월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포연구 논문 조작사건을 계기로 연구윤리 확립에 본격 나선 때문이다. 구 교육부는 연구윤리 확립을 위한 권고문을 발표하고 외국 사례집도 발간하는 등 인식 확산을 시작했고, 구 과기부도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을 제정하는 등 제도 마련에 착수했다.
이 같은 정부와 민간의 연구윤리 확립 노력 또한 아직 미흡하다는 평가다. 우선 현행 연구윤리지침이 교과부 훈령에 그치고 있어 정부의 다른 R&D 관련 부처 적용이 힘들고, 인문사회분야나 비국가 R&D사업에는 해당 지침이 적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연구윤리 준수 우수기관에 대한 인센티브 부여가 미흡하고, 연구윤리에 대한 관심이 일회성에 그치는 등 사회 저변에 연구윤리 인식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연구윤리 지원 사업 예산도 올해 신규로 5억 4천만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 SCI논문 순위 세계 12위... 연구부정 방지 노력은 미흡 = 최근 국내 연구자들의 연구부정행위가 잇따라 드러나게 된 이유는 정부와 민간의 지속적인 R&D 투자로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이 대폭 증가한데 따른 것이다.
올해 정부 R&D 투입 예산은 12조 3437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11.4% 증가했다. 정부는 내년 13조5천억 원, 내 후년엔 16조6천억 원을 R&D에 투입할 계획이다.
R&D 투자에 따른 고급 논문 수도 증가했다. 국내 연구자들의 SCI논문은 2008년 3만5569건으로 인도(3만8700건), 호주(3만6787건)와 비슷한 세계 12위 수준이다. 이는 10년 전 1만645건에서 3.3배나 증가했다.
투자를 통한 논문 실적이 향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부정 방지를 위한 노력은 미흡하다. 정부가 연구윤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게 3년 밖에 되지 않았다. 관련 부서의 잦은 조직개편과 인사 이동으로 전문성 확보도 문제다.
현재 교과부의 연구윤리팀은 지난 5월 조직개편을 통해 인문사회연구과 내에 새로 생겼다. 불과 15개월 전인 지난해 2월 교과부로 통합하면서 생긴 학술연구윤리과가 축소 개편된 것이다.
학술연구윤리과의 기존 업무에서 연구윤리 파트만 뽑아 신설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조직은 축소됐다. 그 전에는 구 과기부 평가정책과와 구 교육부 학술진흥과에서 ‘자투리 업무’로 취급됐었다.
■ 연구압박....인식부재 = 정부와 민간의 R&D 집중 투자와 대학의 연구실적 평가기준의 강화에 따라 교수들에 대한 연구실적의 압박이 연구부정을 조장하고 있다는 게 학계의 의견이다. 이와 함께 연구부정에 대한 정확한 도덕적인 기준이 바로 서지 못 한 결과 상업적인 이익 앞에 연구윤리에 눈 감는 인식이 팽배한 결과다.
특히 남의 논문을 훔치는 표절이나, 자신의 논문을 여러 차례 중복 게재해 실적을 부풀리고 이로 인한 이익을 얻는 이중 게재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이는 관행의 영향이 커 뿌리 뽑기 쉽지 않다. 타인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자신의 연구를 해야 하는 연구자의 본질적인 한계와 함께 자신의 논문을 각종 학회에 여러 차례 게재해왔던 것이 관행이었던 탓에 별다른 죄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기업 연구자와 달리 외부 연구비에 의존하는 대학 교수의 경우 자체 검증 시스템이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 대학 교수는 “연구라는 게 자기 돈으로 하지 않는다. 기업이라면 아마 조작하지 못할 것이다. 승진해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특허를 내 이익을 얻기 위해 부풀리기 위해 논문을 조작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 9월 말에는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가 처음으로 연구윤리지침을 만들었다. 그러나 표절(이중게재 포함)에 대한 일반적인 가이드라인에 머물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과학계의 대표적인 연구부정 사례인 ‘데이터 조작’ 등에 대한 지침이 빠진 반쪽짜리 연구윤리지침이 됐기 때문이다.
과학계와 인문사회계 학회를 망라한 연합회이다보니 가이드라인 마련 과정에서도 두 계열 간 논란이 많았다. 연구책임을 맡은 한민구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는 “데이터 조작은 윤리문제가 아니라 법적인 문제고 오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며 “우리가 관심을 가진 건 그동안 관행이던 표절과 이중게재 문제였다”고 말했다.
이 연구윤리지침은 그러나 국내 학술단체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한 교수는 “미국 학회의 경우는 교수가 A학회에 낸 논문을 B학회에 내면 B학회가 해당 교수의 소속 기관으로 연락해 항의하지만, 국내는 그렇지 못한게 현실”이라며 “이번 지침의 경우 정부기관이 아닌 연구 종사자들이 만들었다는데 있다”고 말했다. 이중게재의 경우도 논란의 여지가 있고, 국내 학술단체측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해외 유명 저널에 논문을 쓰는 1급 연구자들이 국내 학술지를 외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연구윤리 우수 기관에 인센티브
- 2010년 BK21 연차평가시 10% 이내 반영
- 간접 연구비 평가에도 연구윤리 항목 검토교과부는 연구윤리 확립을 위해 내년 2단계 두뇌한국(BK) 21 사업 연차평가시 ‘연구윤리’ 항목을 신설해 10% 이내로 반영하기로 했다. 또 간접연구비 평가 항목에도 연구윤리 항목 신설을 검토, 현재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다. 연구윤리 규정을 강화하는 채찍과 함께 연구윤리를 유도하는 당근도 함께 제공한다는 의미다.
또 연구자가 스스로 자신의 연구성과를 기존 DB나 웹자료 등과 비교해 표절여부를 사전에 점검해 예방하도록 하는 ‘표절예방 정보시스템 구축’도 검토할 계획이다. 지난해 학력위조 검증 시스템과 유사한 웹 기반 시스템으로 DB구축 등 예산 확보가 관건이다.
이밖에 연구윤리 교육도 다양화 활성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초.중등 교육기관과 대학 교과과정에 쓰이는 표준 윤리 교육 교재를 개발해 보급하고 ‘연구윤리정보센터’의 교육컨설팅 기능 강화, 연구기관과 학회, 협회 중심의 교육도 지원할 계획이다.
정국봉 교과부 연구윤리팀장은 “연구윤리 관련 예산이 올해 처음 별도 신설돼 5억 4천만원정도로 규모는 작지만 지금까지 타 부서 남은 예산을 썼던 것에 비교하면 차츰 나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교과부는 연구부정행위 방지 노력과 경비지원을 골자로 하는 ‘학술진흥 및 학자금대출 신용보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내 현재 국회 계류 중이고, 중·장기적으로는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법률’을 별도 입법할 것도 검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