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래 한국 사회를 살펴볼 때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설립된 기관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지방 공항들과 대학이 아닌가 싶다. 공항이 문을 열기만 하면 비행기 승객이 줄을 서며 지역발전이 이루어지리라 예상했고 대학은 설립만 하면 신입생들이 밀려들고 과열된 대학입시 경쟁과 사교육 부담이 해소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지방 공항들은 지역의 애물단지가 되었고 대학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무한경쟁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망이 사통발달로 뻗게 되어 공항 이용 잠재수요를 흡수해 버리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의 수가 전체 대학의 정원수를 못 채우게 될 날이 이렇게 빨리 닥칠지 예상치 못한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앞장서서 지역에 공항을 유치한 정치인의 리스트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대학의 퇴출리스트가 괴담처럼 나돌고 대학의 구조조정을 위한 새로운 정부 부서도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이라는 기관의 존재감이 인식되기 시작했던 때는 아마도 경성제대와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사립대학으로 대학의 모델이 양분되었던 일제치하의 시기였을 것이다. 이렇게 태동된 대학의 모델들은 해방 이후 서울대와 각 지방 도명(道名)을 앞에 붙인 국립대학들, 그리고 민족 지도자 양성에 뜻을 둔 사학재단들이 설립한 사립대학들로 나뉘며 우리나라의 대학 구도를 이뤘고 이 구도는 70년대를 지나 80년대에 까지 40여 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90년대에 이르러 대학준칙주의에 의해 수많은 신생 사립대학들이 세워지며 대학모델의 양대 구조는 조금씩 변화되었고 오늘에까지 이른다.
하지만 사실상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대학 역사 속에서 대학 모델은 딱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일류대학모델’이다. 이른바 ‘서울대 따라 하기’가 모든 한국 대학의 발전전략계획을 대체했고 수능성적의 최고점부터 시작해서 한 계단씩 내려가며 대학의 서열을 매기는 것은 누가 뭐래도 국내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대학평가의 도구였다. 전 국민에게 아주 친근하고 익숙한 이 도구에 대학들은 길들여지며 혹은 안주했고 혹은 자포자기를 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한국의 대학들은 바야흐로 평가와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부 및 기업, 교육 수요자들의 대학개혁 요구에도 꿈쩍 않던 대학들이 국제화를 통한 대학시장의 개방과 다양한 대학평가 앞에서 바짝 긴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수한 고교졸업생들이 외국 대학으로 곧장 진학을 하고, 외국의 유명대학들이 원격교육을 앞세워 국내에 분교가 들어오며, 또한 언론사들의 적극적인 대학평가가 신문지상에 발표되고, 대학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이 정보공시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 공개되자 오랫동안 무사안일의 태도로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보던 대학들도 급기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그 동안 학생들을 등록금 재원으로만 보며 4년간의 대학교육의 결과에 대해 무관심했던 시선이 졸업생들의 취업률에 대한 무한한 관심으로 바뀐 점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업적평가와 훨씬 엄격해진 승진제도로 인해 교수들의 삶은 더 이상 편안하지 않게 되었고 평가와 경쟁이라는 경주에서 이기기 위한 무한질주에 모든 대학이 주자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이 이 경주의 최대 수혜자가 되어 보다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긍정적인 변화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학의 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학 사회의 변화에 이번에는 모든 대학이 이런 평가, 저런 지표의 잣대에 맞추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따라 하기’에서 ‘좋은 것이면 모두 따라 하기’로 모방해야 할 대상만 바뀌었다고나 할까. 무언가 잘하기로 소문난 대학마다 벤치마킹의 요청이 줄을 잇고 남의 대학 중장기발전계획도 독서리스트에 올랐다. 그렇지만 각 대학마다 뚜렷한 교육의 사명의식이나 특성화된 교육목표가 없이 이리저리 남의 대학 좋은 프로그램들만 가져온다고 해서 그 대학에 뿌리를 잘 내리고 조화로운 교육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 대학이 지향하는 모델, 정부부처가 생각하는 대학의 모델, 대학 내부 구성원들의 머리 속 대학모델은 단 하나다. 모방의 대상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획일화된 단 하나의 모델만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글로벌 시대에 이제 우리도 다양한 대학의 모델을 창출해야 한다고 외쳐보지만 정작 정부의 재정지원방식의 획일화와 연구지향으로 쏠린 재정분배, 획일화된 언론사의 대학평가, 획일화된 지표의 공시제도는 모든 대학으로 하여금 어정쩡한 종합-대형-연구지향-백화점식 모델을 지향하게 할 뿐이다.
자연계에서 흔히 동종교배는 유전자의 치명적인 결함을 낳아 퇴화와 멸종을 초래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만간 우리 사회의 그릇 속에 창의인재를 육성할 수 있는 다양한 대학 모델을 담지 못한다면, 정부 교육관리들과 대학인들의 유전자 속에 다양성과 창의력,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DNA가 생성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대학들도 동종교배로 인한 퇴화의 법칙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